지금이 여름의 끝인지 가을의 처음인지 알 수 없다. 한낮의 햇볕은 분명 뜨거웠는데, 작은 전등 불만 환한 저녁의 집필실 밖으론 귀뚜라미가 운다. 8월까지는 여름이라고 해주는 것이 떠나는 여름에 대한 예의인 듯하여 편의상 지금을 여름의 끝으로 정한다. 매일 한 잔 정도 마시던 커피가 하루 두 잔으로 늘었다. 아침에 한 잔, 저녁에 한 잔이다. 아침에는 글을 쓰기 위한 제례의 뜻이, 저녁에는 일과를 끝낸 고단함을 씻는 세례의 뜻이 두 잔의 커피에 담겨 있다. 어찌 보면 커피로 열고 커피로 닫는 삶이다. 저녁의 커피가 나도 모르게 추가 된 시기는 아마도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일자리를 오랜만에 갖게 된 이후부터인 것 같다. 매일 두 개의 일을 하게 되니 두 잔의 커피를 마시게 된 셈이다. 풍랑을 만난 타이타닉호처..
화초의 영혼을 꺼트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3개월이다. 화초라고 하는 생명체의 수명이 수십 년에 이른다는 사실을 도저히 현실적으로 증명해낼 수 없는 나는 수백 년 동안도 나무를 길러내는 지구에게 다만 경의를 표할 수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부터 풀과 꽃과 나무를 좋아했다. 봄과 여름이면 거리에 피어난 수많은 화초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넸고, 커다란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 속에 안겨 잠드는 일을 사랑했다. 잎사귀들을 흔들며 부는 가을바람은 또 얼마나 눈물겨웠던가. 그렇게 초록을 사랑한 나이기에 화초를 기르는 마법도 당연히 내게 주어져 있을 거라 여겼다. 스무살에 기숙사 2층 침대에서 길렀던 테이블 야자는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첫 자취를 기념하며 야심차게 입양했던 고무나무, 페퍼민트, 대나무, 산..
말이 없는 전화 먼 옛날의 일이다 지은 지 백년이 되어간다던 건물의 나선형 돌층계를 오르고 있을 때 내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안개 뒤로 숨기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무음의 소리가 지나온 1층과 머지 않은 3층 사이를 비어있던 시공의 기둥 속을 흔들어 질문들을 뒤섞어 놓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먼 옛날의 일이었다 그날 여러 겹의 벽을 지나온 침묵의 당신은 누구였는가 나를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게 되었거나 사랑하게 될 당신 끝내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한 먼 옛날의 우주여 반복되는 계절이여 웅크려앉은 고독이여 왜 어떤 기억은 사라지고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가 사람은 모두 선택된 옛날 속에 갇힌다 같은 날을 살며 다른 날이라 믿는다 나선형 계단의 2층 즈음에 서서 말 없는 전화를 받는다 어디로 가려했는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황금이 될 때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다. 베스트셀러를 구입하려는 사람과 베스트셀러는 구입하지 않으려는 사람. 어릴 적부터 반골 기질이 강했던 나는 기를 쓰고 베스트셀러를 사지 않으려 했다. 잘 팔리는 책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요즘 무엇이 잘 나가고 있는지부터 꿰고 있어야 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태풍이 몰아친 것은 2001년이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혼자 팔장을 낀 채 서점에 가득 진열된 들을 바라보며 대중독자들의 취향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군 이라고 생각했다. 수십 만 권의 가 팔려나갔지만 누군가 드디어 연금술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뉴스에서 들어보지 못한 채로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실은 1988년에 쓰여진 이 책을 2018년에, 88쇄 기념 리커버..
내 고향은 붉은 노을과 푸른 뱃고동 사이 고향에 대해 생각하면 두 가지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새벽녘의 먼 바다에서 들려오던 뱃고동 소리. 다른 하나는 붉게 물든 공터의 노을 속에 흩어지던 아이들의 웃음 소리다. 앞의 것은 부산 감천동의 풍경이고, 뒤의 것은 서울 마천동의 풍경이다. 유년시절의 나는 부산과 서울을 두 축으로 여섯 번이 넘는 전학을 경험했었다. 부산과 서울, 두 풍경 중에 나를 더 유년의 시간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뒤의 풍경이지만, 더 애잔한 마음에 젖게 만드는 것은 앞의 풍경이다. 그래서 때에 따라 내 고향은 부산이 되기도 하고, 서울이 되기도 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은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를 고향으로 둔 두 청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향을 마음 속에서 지우고 서울에서 성공한..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때로 시간은 호수처럼 고여 있다. 지난 밤 크레이터를 드러내며 은은한 빛을 발하던 달을 멍하니 바라보던 때에도, 수 년 만에 북두칠성을 발견한 밤에도 시간은 호수와 같았다. 그런 때의 시간은 손톱 끝으로 건드리면 잔잔한 파문이 일어날 것처럼 액체화된다. 우두커니 서 있는 시간은 청와대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심한 표정의 경호원 같기도 하다. 초능력자가 나오는 영화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완전히 멈춰버리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흑백으로 변해버리지도 않는다. 바다인가? 라고 생각될 정도의 거대한 호수의 아득한 저편에서 한 무리의 흰 두루미들이 천천히 날아오르고, 고요히 내려앉는 광경을 떠올리는 편이 더 알맞을 것 같다. 호수의 시간은 멈춰 있는 ..
나는 문득 지갑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쓰고 있는 소가죽으로 된 네이비색 지갑 이전의 지갑에 대해서 말이다. 그 지갑은 지갑이라는 사물의 사회성에 대해 인식하기 이전에 사용하던 것이었다. 내가 “이런 지갑을 사용해도 괜찮겠어?” 라는 질문을 들은 것은 10여년 전이었다. 질문을 던진 친구는 친절하게도 그 질문을 다시 듣지 않아도 좋을 중급 브랜드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나는 별 고민도 없이 다음 날 백화점에서 20만 원을 들여 이런 지갑이 아닌 지갑을 구매했었다. 묘한 일이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이런 지갑’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지갑의 생김새가 떠오르지 않았다. 묘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 시절 지갑을 새로 사도록 권했던 친구는 대체 누구였던가. 이름도, 성별도, 혈액형도 떠오르지 않았다..
방금 내린 케냐AA 한 잔과 함께 처음 집필실 책상에 앉았다. 고개를 오른 쪽으로 살짝 돌리면 창으로 길죽한 직사각형의 하늘이 보이는 곳이다. 아직은 책상 하나와 몇 개의 악기들을 늘어놓았을 뿐, 인테리어를 시작하지 않았다. 벽지와 벽지 사이의 틈이 갈라진 곳도 있고, 진득한 테이프 자국이 남은 곳도 보인다. 이런 것 정도는 보수를 해달라고 요청한 뒤 이사를 했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지난 겨울 별 생각 없이 이 마을을 찾았다. '다방'이라고 하는 부동산 매물 찾기 앱을 통해 본 다락방이 있는 작은 집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주말에 심심하니 남의 집이라도 보고 다니자는 심산이었다. 마을에 도착해 앱에 있는 연락처로 연락을 했으나 오늘은 보기 어렵다는 답을 받았다. 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