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이가 우물을 찾는다." 라는 표현은 얼마나 낡은 표현인가. '우물'이라는 사물이 인간의 곁에 있었던 시대는 이미 20세기의 전반부에 끝나버렸고, 적어도 인류의 절반 이상은 우물을 찾아나서야 할 만큼 목이 마를 일도 없다. 그럼에도 삶과 아주 멀어져버린 이 표현은 여전히 살아남아 기어이 무명 문필가의 제목으로 등장하고야 말았다. 굳이 이런 것을 준엄하게 꾸짖으려고 시작한 글은 아니다. 그저 연초에 트위터에 복귀해 틈틈이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더니, 역시나 에세이를 쓸 욕망이 적어지더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적당히 목이 말라야 세상에 없는 우물이라도 찾아나서게 되는 것이 인간이지 싶다. 그래도 반년 가까이 휴식을 한 덕에 좀 서먹하기도 하여 예전에 비해서는 트윗량이 크게 줄었다고 자부(?)한..
플랜 A의 삶은 20대에 천재 작가가 나타났다는 찬사를 받으며 혜성 같이 문학계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준수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는 한편, 싱송라로도 데뷔하여 유희열의 스케치북 무대에도 올라보는 게 나의 꿈이었다. 또 운명의 연인과 20대에 일찍 결혼하여 함께 서로와 세상을 밝히는 동반자로 살아가겠다는 게 중딩 시절부터 이상적으로 그리던 플랜 A의 미래였다. 드라마 에 등장했던 GOP 위에서 20대의 끝을 맞이했으나 내 삶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삶을 드라마로 만들기에 20대의 나는 너무 어리석었다. 30대에도 플랜 A로의 희망고문은 이어졌다. 조금 늦어졌을 뿐 플랜 A의 삶은 언제라도 다시 시작되리라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봤다는 점괘를 무의식 속에서 붙잡고 있기도 했다. 점괘에..
"멀고, 느린, 구름이란 건 어떻게 생긴 구름인가요?" 멀고느린구름이란 이름을 십수 년간 써왔지만 그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글쎄... 사실 그렇게까지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본 적은 없었기에 나는 그날 처음 멀고느린구름의 모습을 상상했다. 노을 지는 저녁의 새털구름, 봄바람 속에 떠가는 양떼구름, 태풍이 지난 후의 뭉게구름, 높은 가을 하늘 속의 실구름... 멀고느린구름은 그 모두이면서 동시에 어느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이 가득하지만 나는 나 자신만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이래, 나는 이렇게 해야 해, 나는 이걸 원해. 별 망설임 없이 나를 주장해왔다. 허나 지나고 보면 모두가 교만에 불과했다. 나는 자화상은 잘 그리는지 몰라도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방법은 ..
만취해 인사불성이 된 사람도 어떻게든 자신의 집은 찾아간다. 이른바 귀소본능이다. 인테리어를 하는 데도 귀소본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5년 전 일터였던 '좋은커피' 매장을 내 버전으로 복원해보겠다며 어제 주방 벽 한 켠을 페인팅했는데... 완성하고 보니 '좋은커피'가 아니라, 연남동 집의 주방에 가깝다. 연남동 집의 주방은 셀프 조색을 통해 만든 색이었는데, 의식하지 못하고 새로 주문한 페인트 색깔이 딱 그 색이다. 나도 모르게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공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아뿔싸- 하면서도 아득하게 밀려드는 추억의 파도를 멍하니 앉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밀물은 심야를 훌쩍 지나도록 썰물이 되지 않았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는데, 아침형 인간의 습성도 고쳐지지 앉아 또 ..
몇 주 전 주방의 유리창을 고방유리 무늬로 바꿨다. 직사각형 모양 두 개를 이어놓은 창에서 빛이 묘하게 굴절되며 주방 곳곳으로 은은하게 번진다. 덕분에 이사 온 후 한 번도 일상의 중심 공간이 되지 못했던 주방이 요즘 내게 사랑 받기 시작했다. 집필실이 추운 탓에 간단한 에세이는 주방에서 쓰고 있다. (지금 바로 이 글도) 내가 인테리어 일을 좋아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이런 변화 때문이다. 아주 작은 변화 하나로 하루의 빛이 마음의 표정이 바뀌곤 한다. 작은 유리창에 고방무늬 유리시트지를 부착하는 일에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 한 시간이 이후의 여러 스물네 시간을 바꾸고 있다. 처음 이사 오기 전의 구름정원의 벽은 어딘가 누추해보이는 아이보리색으로 가득해 어쩐지 대학..
시간여행자 양준일 씨에게 반했다. 이것은 모종의 자기애가 아닐까 싶다. 그의 말씨와 태도, 생김새는 어딘가 조금씩 나와 닮았다. 그는 올해로 50대가 되었고, 나는 내년이면 40대가 된다. 재능이 반짝였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 그의 20대와 나의 20대를 억지로 맞추어 보며, 나의 10년 후를 다시 그려보게 된다. 오래전 30대 중반 즈음, 한 사람에게 마흔이 될 때까지 이름을 얻지 못하면 삶을 정리하겠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스로 내뱉어놓고도 놀란 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말은 다짐이라기보다는 미리 던져놓은 포기 선언이 아니었나 싶다. 그로부터 노력 아닌 노력을 해왔지만 아직 그다지 좋은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만큼 했으면 그만두는 게 역시 좋을까. 공연한 희망고문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
집에서 늘 바라보이던 산이 며칠 내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미세먼지 탓이다. 덕분에 목이 계속 칼칼하다. 공기청정기는 집필실을 지키고 있고, 나는 집필실에 출입하지 않은지 꽤 되어 간다. 사라진 산의 자리는 연한 잿빛의 안개로 채워진다. 아침에 소파에 앉아 멍하니 안개 속을 바라보고 있으면 끼루루- 끼루루- 하는 소리와 함께 먼 곳에서 온 새의 무리들이 줄지어 날아간다. '철새'라는 말이 정치인과 보도인들에게 오염되어, 나는 그들을 여행새라 부르고 싶다. 바야흐로 여행하는 새들의 계절이다. 강원도 철원에 살 때 3년 동안 여행새들을 겨울마다 가까이서 보았다. 이르면 10월 늦으면 11월쯤, 바이칼 호수 부근에서 날아올라 따뜻한 남쪽의 나라로 여행하는 수천 마리의 새들은 자연물로서의 인간이 지닌 한계를 ..
날도 추워지고 산더미 같은 직장 업무로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탓에 평일 중에는 집필실 구경도 못하고 있다. 내 집인데 신경 쓰지 않으면 구경도 못하는 공간이 있다는 건 좀 특별한 기분이다. 영앤리치가 된 기분이랄까. (전혀 '영'이 아니지만. 물론 '리치'도 아니다. 왜 쓴 거지.) 구름 정원에서 세 계절을 지내보니 역시 좋은 집은 좋은 거구나 싶다. 여러 일로 우울감이 계속되고는 있지만, 예전 오리빌라 시절처럼 집에 앉아 있으면 괜시리 서글퍼지는 일은 이제 없다. 구름정원에서는 오히려 우울하다가도 집안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야 그래도 제법 사네 나? 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뭐랄까, 약간 마음이 놓인다. 제대로 경제 관념이 박힌 청년이라면 월세를 줄이고 단칸방에 살면서 열심히 빚을 청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