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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여름 끝의 커피

멀고느린구름 2019. 8. 26. 21:33

지금이 여름의 끝인지 가을의 처음인지 알 수 없다. 한낮의 햇볕은 분명 뜨거웠는데, 작은 전등 불만 환한 저녁의 집필실 밖으론 귀뚜라미가 운다. 8월까지는 여름이라고 해주는 것이 떠나는 여름에 대한 예의인 듯하여 편의상 지금을 여름의 끝으로 정한다. 

 

매일 한 잔 정도 마시던 커피가 하루 두 잔으로 늘었다. 아침에 한 잔, 저녁에 한 잔이다. 아침에는 글을 쓰기 위한 제례의 뜻이, 저녁에는 일과를 끝낸 고단함을 씻는 세례의 뜻이 두 잔의 커피에 담겨 있다. 어찌 보면 커피로 열고 커피로 닫는 삶이다. 저녁의 커피가 나도 모르게 추가 된 시기는 아마도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일자리를 오랜만에 갖게 된 이후부터인 것 같다. 매일 두 개의 일을 하게 되니 두 잔의 커피를 마시게 된 셈이다. 

 

풍랑을 만난 타이타닉호처럼 흔들리던 마음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구름정원의 흔들의자에 앉아 멀리서 피어나는 구름이나, 아스라이 반짝이는 작은 별빛을 흔들흔들 바라보면 내가 살아온 인생이 모두 거짓말 같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행복은 불행 속에서, 미소는 슬픔 속에서 찾게 되는 법이라, 겨우 마음이 평온을 찾고나니 반대로 그간 내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었는지를 알겠다. 

 

공자의 손자 자사는 <중용>에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음을 신중히 한다(君子必愼其獨也)"고 하였다. 내 삶의 계율로 삼아 오래 지켜오던 말이었다. 홀로 커피를 내릴 때조차도 늘 마음을 다하여 물줄기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애써 왔던 나였다. 하지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 된 실패를 겪은 뒤로 혼자 마시는 커피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긴 기간 동안 내 커피의 물줄기는 한 사람을 위해서만 바르게 내려졌다. 그이를 만날 때만 바른 사람인 척 애썼고, 혼자일 땐 온종일 흐트러져 지낸 날이 많았다. 나를 흐트러뜨린 것은, 스스로 정한 계율을 어긴 것은 바로 나 자신임에도 공연한 이의 탓을 하며 살았다. 술에 취한 자가 묵묵히 바로 선 든든한 기둥을 보면 괘씸해지는 법이다. 너는 왜 이렇게 멀쩡하냐고, 나는 이렇게 흔들리는데. 그 기둥이 나를 위하여 애써 버티고 선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오늘은 나도 애써 커피를 내리는 물줄기를 바르게 해보았다.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그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최근 시간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과연 시간이란 것은 무용하다. 어느 날에는 내가 3년 전의 파리에 있고, 어느 날에는 5년 전의 종로 밤거리에 있다가, 또 한 날은 오지 않은 시간 속에 멍하니 놓여 있으니 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인간이란 후회와 절망, 그리움과 꿈이라는 도구로 미래와 과거와 지금을 언제나 동시에 사는 희한한 생물이다. 

 

때때로 천년 후의 사랑을 생각한다. 여름과 커피에는 끝이 있어도 어떠한 사랑에는 끝이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 귀뚜라미는 오늘 밤 천 번도 넘게 울겠지. 누구의 생을 대신하여 그렇게 우는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서러움을 딛고 끝내 다정해지는 밤이길 소원한다.

 

2019. 8. 2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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