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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시간의 호수, 호수의 시간

멀고느린구름 2019. 6. 19. 06:14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때로 시간은 호수처럼 고여 있다. 지난 밤 크레이터를 드러내며 은은한 빛을 발하던 달을 멍하니 바라보던 때에도, 수 년 만에 북두칠성을 발견한 밤에도 시간은 호수와 같았다. 그런 때의 시간은 손톱 끝으로 건드리면 잔잔한 파문이 일어날 것처럼 액체화된다. 우두커니 서 있는 시간은 청와대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심한 표정의 경호원 같기도 하다. 초능력자가 나오는 영화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완전히 멈춰버리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흑백으로 변해버리지도 않는다. 바다인가? 라고 생각될 정도의 거대한 호수의 아득한 저편에서 한 무리의 흰 두루미들이 천천히 날아오르고, 고요히 내려앉는 광경을 떠올리는 편이 더 알맞을 것 같다. 호수의 시간은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완전히 멈춰지지는 않은 세계를 만든다. 

 

아름다운 추억들은 대개 그 호수의 시간에 머문다. 강물에 휩쓸려 우르르 흘러가지 않고, 호수에 고인 기억들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만 훼손되며 호수를 둘러싼 흙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게 된다. 빛나는 기억이 스러지는 속도보다는 내 수명이 줄어드는 속도가 훨씬 빠를 것이니, 살아 있는 동안은 아마 적당히 호수의 형태를 지키며 추억은 거기에 머무르리라. 

 

새벽의 푸른 어스름빛 속에 잠겨 있으면, 나도 모르게 호수의 시간을 만난다. 글을 쓰는 일은 그 호숫가에 앉아 빈 낚싯대를 드리우는 일과 같다. 아름답다와 행복하다는 서로 다른 말이다. 때로는 슬픔이, 때로는 고통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 빈 낚싯대에는 당신의 반짝이던 미소도 스치지만, 쓸쓸한 뒷모습과 종말을 예고하던 눈빛도 걸려들고 만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는 라이터를 찾는 동작 같은 것도 없이, 그저 잠자코 그 모든 희로애락을 바라보며 되뇌인다. 

 

어리석었고, 어리석었구나. 

 

그리고 나는 여전히 어리석은 자로 하루를 살아가며 다시 오지 않을 생의 순간들이, 때로 강물과 같이 지나가버리고, 때로 이 시간의 호수로 흘러드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본다. 언젠가 모든 일들은 음악이 되거나, 글이 되거나, 한숨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언젠가는 달빛이 미치지 못하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한 사람의 모든 일들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오늘도 나는 그 덧없는 결말을 향해 한 편의 글을 남긴다.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 당신을 그리워한다. 

 

 

2019. 6. 1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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