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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그 시절 내가 잃어버린 지갑

멀고느린구름 2019. 6. 9. 08:57

 

나는 문득 지갑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쓰고 있는 소가죽으로 된 네이비색 지갑 이전의 지갑에 대해서 말이다. 그 지갑은 지갑이라는 사물의 사회성에 대해 인식하기 이전에 사용하던 것이었다. 내가 “이런 지갑을 사용해도 괜찮겠어?” 라는 질문을 들은 것은 10여년 전이었다. 질문을 던진 친구는 친절하게도 그 질문을 다시 듣지 않아도 좋을 중급 브랜드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나는 별 고민도 없이 다음 날 백화점에서 20만 원을 들여 이런 지갑이 아닌 지갑을 구매했었다. 

 

묘한 일이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이런 지갑’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지갑의 생김새가 떠오르지 않았다. 묘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 시절 지갑을 새로 사도록 권했던 친구는 대체 누구였던가. 이름도, 성별도, 혈액형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날의 정황만은 선명했다. 우리는 서울 해방촌 어딘가의 루프탑 바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 그랬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다 - 투명한 푸른빛의 칵테일을 마시며 인생이 멈춰버린 것 같다고 한탄했다.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하와이안 블루’ 빛깔을 닮은 바다 속에 잠긴 채로 태평양의 저 편에 있을 고국을 그리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백수였고, 그는 이제 막 대리로 승진한 참이었다. 단, 한 번도 태어난 나라를 벗어나 본 일이 없었던 그 시절의 나는 이방인의 감성을 갈구하는 친구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 참 좋겠다 라고만 답하고서 내 앞에 놓인 ‘블랙러시안’을 한 모금 삼켰다. 강렬한 석양빛 탓에 블랙러시안마저 투명한 단풍색으로 보였다. 태양은 유리잔들을 통과하며 여러 색들을 테이블 위에 쏟아놓았다. 친구의 유리잔 옆으로는 한밤의 와이키키 해변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상하지. 내 기억은 거기서 끊어졌다. 한밤의 와이키키 해변에서 말이다. 여전히 내 인상에 남은 밤바다라고 해봤자 대학생 무렵 혼자 흘러들었던 거제도 몽돌해수욕장의 바다가 전부였다. 여전히 나는 태어난 나라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그 친구는 어쩌면 지금 와이키키의 밤바다에서, 목까지 몸을 바다에 잠근 채, 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휴대폰 나침반 앱을 켜서 동쪽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등 뒤에서는 그날처럼 해가 지고 있었다. 내 앞으로는 그날의 블랙러시안을 닮은 밤이 떠오르고 있었다. 

 

친구의 조언에 따라 지갑을 바꾼 뒤, 나는 직장을 얻었다. 대리가 되었고, 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인생이 멈춰버린 것 같다고 한탄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친구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다. 인생이 끝난 것 같다 라고 하는 쪽이 더 적절한 표현이지 싶다. 그 시절과 다름 없이 블랙러시안을 한 모금 삼키며, 모두들 10년쯤 후에는 인생을 끝내버리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갑의 생김새는 몰라도 지갑 속에 존재했던 것들은 기억한다. 지갑에는 영원한 사랑을 고백했던 사람의 증명사진이 꽂혀 있었고, 고향에서 우연히 만난 어릴 적 친구의 전화번호 메모도 붙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산 전화카드와 고등학교 시절 쓰다 남은 버스 회수권도 있었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했던 까페 점장의 명함과 실종된 친척의 명함도 함께 거기 있었다. 

 

그러고보니 아니다. 나는 지갑을 바꾼 게 아니었다. 친구와 만난 바로 그날 밤 나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아니다. 어쩌면 그날,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나타나는 그 찰나에 이름 모를 친구가 나의 지갑을 가져가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백화점에 중급 브랜드의 지갑을 사러 가던 날, 그는 태평양을 건너는 항공편에 올라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 인생의 다른 얼굴을 훔쳐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내가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동쪽 하늘로 밤이 차오른다. 빈 유리잔에는 캄캄한 허공만이 가득하다. 한 잔 더할까 하다가 ‘출근’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그만둔다. 한적하던 루프탑 바에 밤을 즐기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며 소란스러워진다. 자리를 비운다. 중급 브랜드의 네이비색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결제를 한다. 군데군데 녹이 슨 철제 계단을 툭툭 내려오는 길에 문득 뒤돌아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한밤의 와이키키 해변 같은 빛이 가득했다. 이제 막 떠오른 달이 영원한 연인처럼 우두커니 밤을 밝히고 있었다. 

 

2019. 6. 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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