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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읊조리다

詩 - 말이 없는 전화

멀고느린구름 2019. 8. 1. 00:13

말이 없는 전화

 

먼 옛날의 일이다

지은 지 백년이 되어간다던 건물의

나선형 돌층계를 오르고 있을 때

내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안개 뒤로 숨기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무음의 소리가

지나온 1층과 머지 않은 3층 사이를 

비어있던 시공의 기둥 속을 흔들어

질문들을 뒤섞어 놓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먼 옛날의 일이었다

그날 여러 겹의 벽을 지나온

침묵의 당신은 누구였는가

 

나를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게 되었거나

사랑하게 될 당신

 

끝내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한

먼 옛날의 우주여

반복되는 계절이여

웅크려앉은 고독이여

 

왜 어떤 기억은 사라지고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가

 

사람은 모두 선택된 옛날 속에 갇힌다

같은 날을 살며 다른 날이라 믿는다

나선형 계단의 2층 즈음에 서서

말 없는 전화를 받는다

어디로 가려했는지 기억을 잃고

첫 입맞춤의 장면을 떠올리지 못한다

하루도 살아보지 않은 사람처럼 태연히

다음 하루를 또 살아갈 것이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제발 이름을 불러주세요

 

2019. 7. 3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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