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어떤 날들이 내게 있었다 그날 저녁은 날이 흐렸다. 아니, 흐렸다기보다는 어떤 흔적을 품고 있는 날씨였다. 내일 비가 오리라는 흔적, 혹은 어제 비가 내렸다는 흔적 같은 것이 저녁 하늘의 얼굴에 담겨 있었다. 우리는 우연히 학교 후문에서 마주쳤거나, 함께 노래방에 가기로 하고 만났을 것이다. 푸른 멍자국 같은 먹구름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사이로 희미한 노을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20대 중반의 우리는 그 노을빛을 머금은 채, 아주 잠깐 인생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산다는 건 뭘까. 글쎄. 계속 이렇게 ‘글쎄’를 반복해가는 것 아닐까. - 새벽이었던가, 이른 아침이었던가. 아무튼 나는 광기로 가득 차 어스름빛을 발로 걷어차며 헤어진 연인의 집으로 향했다. 불이 켜지지 않는 캄캄한 계단을 ..
언어의 농부에게 숲을 좋아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가다보면 늘 갈피마다 숲 속에 앉아 있는 나를 만난다. 옅은 물기를 머금은 흙 위에 앉아 무릎을 세운 뒤, 거기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면 슬픔도 불안도 잠잠해지고는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초록의 잎새들 너머의 푸른 대양에 거대한 구름의 배들이 지났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작은 몸에서 빠져나와 영혼의 배를 타고, 마음으로만 갈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책을 읽는 것은 지도를 펼치는 것과 같았다. 얼마 전 읽은 책들은 항해의 지도가 되어, 숲 속의 나를 보다 선명한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지난 여름 서울 해방촌에 있는 독립서점 별책부록에서 안리타 작가의 이라는 아름다운 지도를 ..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황금이 될 때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다. 베스트셀러를 구입하려는 사람과 베스트셀러는 구입하지 않으려는 사람. 어릴 적부터 반골 기질이 강했던 나는 기를 쓰고 베스트셀러를 사지 않으려 했다. 잘 팔리는 책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요즘 무엇이 잘 나가고 있는지부터 꿰고 있어야 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태풍이 몰아친 것은 2001년이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혼자 팔장을 낀 채 서점에 가득 진열된 들을 바라보며 대중독자들의 취향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군 이라고 생각했다. 수십 만 권의 가 팔려나갔지만 누군가 드디어 연금술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뉴스에서 들어보지 못한 채로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실은 1988년에 쓰여진 이 책을 2018년에, 88쇄 기념 리커버..
내 고향은 붉은 노을과 푸른 뱃고동 사이 고향에 대해 생각하면 두 가지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새벽녘의 먼 바다에서 들려오던 뱃고동 소리. 다른 하나는 붉게 물든 공터의 노을 속에 흩어지던 아이들의 웃음 소리다. 앞의 것은 부산 감천동의 풍경이고, 뒤의 것은 서울 마천동의 풍경이다. 유년시절의 나는 부산과 서울을 두 축으로 여섯 번이 넘는 전학을 경험했었다. 부산과 서울, 두 풍경 중에 나를 더 유년의 시간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뒤의 풍경이지만, 더 애잔한 마음에 젖게 만드는 것은 앞의 풍경이다. 그래서 때에 따라 내 고향은 부산이 되기도 하고, 서울이 되기도 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은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를 고향으로 둔 두 청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향을 마음 속에서 지우고 서울에서 성공한..
양명대 303과 우리의 생은 때로 어떤 음악에게 빚을 진다. 오지은 서영호의 프로젝트 음반 을 씨디플레이어에 걸고 첫 가사를 들었을 때 내가 이 음악에게 빚을 지겠구나 직감했다. 이 음반이 첫 번째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유지하고 있는 분위기를 표현하자면 다소 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쓸쓸함이라거나, 외로움 같은 말로 간단히 표현하거나, ‘멜랑꼴리’ 같은 세 줄 짜리 음악평론에 등장하는 어휘를 사용할 수는 없다. 20대 시절에 나와 친구들은 양명대 303에서 종종 모여 대통령 선거라든가, 마음이 이끌리기 시작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명대’는 우리 중 한 친구가 살던 빌라의 이름이고, 삼공삼은 당연히 303호실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다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묘하게도 양명..
박낙종 베트남은 호치민 이후에도, 이전에도 이 책은 썩 훌륭한 책이다. 베트남과 라오스와 미얀마를 지도에서 구분해내기 위해 구글 검색 찬스를 써야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말이다. 베트남이 독립국으로서 18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인구는 1억에 육박하고, 수십 갈래의 소수민족과 공생해오는 동안 유네스코에서 보존가치를 인정한 다채로운 전통문화를 꽃피워왔다는 사실을 나는 당연히 몰랐다. | 베트남은 장구한 역사와 다채로운 문화를 지닌 나라다 내가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 한대수의 노래 중에 '호치민'이라는 곡이 있다. "호치민에 대해서 말하자면 거 참 재밌는 사람이에요."하고 시작되는 한대수의 읊조림은 폭격음처럼 거칠게 쏟아지는 록 사운드를 견뎌내며 이어진다. "약 3200일의 끝없는 폭격을 밤낮으..
손경수 카리브의 바다는 어떤 빛깔로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우편함에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흰 봉투가 있다. 혹시라도 내가 폭발물 테러의 대상이 될 정도의 국가주요인물일까봐 걱정하며 봉투를 열었는데, 그 속에서 공짜 비행기 티켓이 한 장 나타난다. 이 티켓에 쓰여진 여행지에 대해 서술하시오. 위와 같은 문제가 느닷없이 20대 후반 즈음의 내게 출제되었다면 나는 분명 쿠바에 대해 써내려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한창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폐해를 겪으며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체게바라의 열풍은 이미 한반도를 지나간 지 오래였지만, 나는 뒤늦게 라는 영화를 통해 ‘체’에게 빠져들었었다. | 혁명가가 되기 이전 청년의사 체게바라의 여행을 다룬 영화 내게 쿠바는 영웅의 나..
오사코 히데키 우리가 아프리카에 대해 말하려면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머리 위에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린다. 신발 속의 모래를 털어내야 할 것 같고, 기아에 굶주려 형형히 눈동자만이 빛나는 아이들에게 무어라도 건네야 할 것 같다. 우리 속의 아프리카는 그렇게 하나의 대륙에서, 경계가 불분명한 하나의 나라로, 그리고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어 왔다. 나는 아프리카 대륙에 53개국의 나라가 있으며, 다양한 기후와 자연환경이 존재하고, 피부색도, 문화도, 종교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지 못했다. 어떤 대상에 대해 모호한 이미지만으로 판단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선입견’이라고 부른다. 아프리카는 내게 그 대륙의 크기만큼 거대한 ‘선입견’이었다. |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마사이족'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