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모든 것이 선명했습니다. 거리와 하늘빛 그 모든 해상도가 전에 없이 높았습니다. 당신은 모든 먼지가 우주로 쓸려나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가을옷과 겨울옷을 섞어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오후의 거리를 거닐었고, 새파란 하늘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우리는 까치발로 힘껏 손을 뻗어 파랑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고, 해사하게 웃었습니다. 우리는 긴 슬픔을 지나온 사람들임을 잊었고, 우리에게 닥칠 절망도 그날에는 몰랐습니다. 갈색 가죽구두와 검정 애나멜구두에 채이는 햇살들은 작은 강아지들의 털을 뭉쳐 만든 공 같았습니다. 아주 먼 우주 저 편에서 태양이 보내온 말들은 소리 없는 음악이었고, 이따금 우리를 어루만지는 청량한 바람은 사랑의 고백이었던 날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시 올..
'여름, 바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올해도 해운대에는 더위를 피하려는 피서객들이 몰려…” 같은 말로 시작되는 기사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내게 '여름, 바다'라고 하면 역시 10여 년 전의 그 바다다. 스물, 스물하나 즈음이었고, 흠모하던 선배를 따라 수영부에 가입했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물 위로 떠오르지도 못하던 신세였다. 반면 선배는 국가대표 유망주로 지역 인터넷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던 실력자여서, 수영부원의 팔 할은 그의 신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영부원들은 새 학기의 종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각자 치열하게 몸만들기에 들어갔다. 동아리방의 간판은 분명 수영부였지만, 교내에 수영장을 마련해놓을 정도로 전도유망한 학교도 아니었고, 사실 다들 그리 수영에 진심인 ..
그남이 갑자기 총을 꺼내들었을 때, 별일이 다 있군 싶었다. 통장의 잔고를 떠올리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와, 아차 했으나 그남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조금 언짢은 표정만 지어보였다. 나는 자 이제 어쩌라는 거죠 라는 심정이 되어 그남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남 자신도 딱히 준비해둔 원고가 없는지, 총을 든 채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별 수 없어서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뭘 원하죠? 돈, 아니면 저한테 무슨 원한이 있나요?” 그남은 긴장한 듯 더듬더듬 응답했다. “이...일단 신고, 신고는 하지 마요. 아니,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알았어? 알았냐고?” 그남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카운터에는 전화기가 없었고, 내 휴대폰은 그남 뒤편의 콘센트에 충전을 위해 꽂아둔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알..
당신이 떠나고 난 다음 날 숙소는 적막했습니다. 단풍잎 같은 깃털을 단 작은 새의 울음 소리가 창을 넘어오고, 가을볕은 투명한 강물처럼 넘실거려, 어떤 인생의 절정을 내게 선사하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불 속에서 멍하니 휴대폰 속 당신의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의 미소와 그 속에 깃든 우리의 계절들을. 그대로 당신을 따라 공항으로 달려갈까 싶었지만, 어젯밤 짐짓 의연하게 당신을 배웅했던 일이 떠올라 숨을 골랐습니다. 간신히 이불 속에서 나와 숙소에서 주는 모닝토스트를 먹으러 갔습니다.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나를 위해 미리 지배인에게 이틀치 조식을 예약해두었으니, 꼭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당신은 떠났지요. 모닝토스트는 바삭하고, 촉촉했습니다. 우유는 신선했고요..
폭설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일주일 내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던 아침 기온은 영상을 회복했다. 사무실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누가 황씨 노인의 집에 방문하는가를 두고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내 몫이 될 것을 예감했다. “김군이 가지.” 사무국장의 말에 모두들 안도했다. 황씨 노인은 30년 넘게 혼자 살고 있는 독거노인으로 자기 이름도 모를 정도의 치매를 앓고 있었고, 여러 가지로 건강상황이 좋지 않아 다들 이번 혹한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 예상했다. 사실상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방문이었다. 황씨 노인이 살고 있는 쪽방촌으로 향하는 가파른 비탈길에도 눈이 가득 쌓여 엉금엉금 기어올라 가야 했다. 미련이 남은 듯 하늘에선 진눈개비가 소륵소륵 떨어지고 있었다. 수차례 미끄러 넘어지면서도 기어이 죽음을..
새벽에 잠에서 깨어 내 작은 뜰에 나서니 새벽별의 냄새가 났다. 희붐히 밝아오는 하늘의 왼편 저 멀리에 방금 세수를 마친 것 같은 별이 빛나고 있었고, 11월의 찬 바람이 지났다. 아주 어리던 시절부터 익숙하게 맡아왔지만 이름은 갖지 못했던 어떤 냄새가 확 끼쳐왔는데, 이제 나는 그것을 ‘새벽별의 냄새’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냄새는 고향의 냄새 같기도 하고, 오래 애정한 겨울 스웨터의 냄새나 사랑하는 이의 손을 붙잡고 바라본 바다의 냄새 같기도 했다. 동화나 환상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별에서 오고, 별로 돌아간다고 종종 쓰여진다. 그러니 밤이 끝나고, 아침이 시작되는 순간의. 완전히 끝도 아니고, 완전히 시작도 아닌 어떤 찰나가 일으킨 냄새를 ‘새벽별의 냄새’로 부르는 것은 나쁘지 ..
나는 문득 지갑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쓰고 있는 소가죽으로 된 네이비색 지갑 이전의 지갑에 대해서 말이다. 그 지갑은 지갑이라는 사물의 사회성에 대해 인식하기 이전에 사용하던 것이었다. 내가 “이런 지갑을 사용해도 괜찮겠어?” 라는 질문을 들은 것은 10여년 전이었다. 질문을 던진 친구는 친절하게도 그 질문을 다시 듣지 않아도 좋을 중급 브랜드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나는 별 고민도 없이 다음 날 백화점에서 20만 원을 들여 이런 지갑이 아닌 지갑을 구매했었다. 묘한 일이었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이런 지갑’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지갑의 생김새가 떠오르지 않았다. 묘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 시절 지갑을 새로 사도록 권했던 친구는 대체 누구였던가. 이름도, 성별도, 혈액형도 떠오르지 않았다..
박홍규 화백의 판화 . 본문의 그림은 모두 박홍규 화백의 판화. 다시 새 하늘 열리면 기억해주오 * 이 소설은 경북 상주 지역 동학 대접주 김현영 선생의 후손인 김종규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고종 갑오년 음력 9월 초엽이었다. 상주의 김현영 접주는 이미 지난 8월 25일, 남원에서 김개남 접주가 재봉기를 결행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난 6월 21일, 왜구가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한 이후로 민심은 들끓고 있었다. 왜란 때 이 강산에 흘려진 피가 채 마르지 않았다. 무능한 신하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임금의 판단을 흐리며, 여전히 민씨 일가가 국정을 문란케 하고 있으니 저 왜구들이 나라의 대들보를 뜯어가도 이리 잠자코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천의 최맹순 접주도 농민군 조직을 다시 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