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없는 전화 먼 옛날의 일이다 지은 지 백년이 되어간다던 건물의 나선형 돌층계를 오르고 있을 때 내가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안개 뒤로 숨기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무음의 소리가 지나온 1층과 머지 않은 3층 사이를 비어있던 시공의 기둥 속을 흔들어 질문들을 뒤섞어 놓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먼 옛날의 일이었다 그날 여러 겹의 벽을 지나온 침묵의 당신은 누구였는가 나를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게 되었거나 사랑하게 될 당신 끝내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한 먼 옛날의 우주여 반복되는 계절이여 웅크려앉은 고독이여 왜 어떤 기억은 사라지고 어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가 사람은 모두 선택된 옛날 속에 갇힌다 같은 날을 살며 다른 날이라 믿는다 나선형 계단의 2층 즈음에 서서 말 없는 전화를 받는다 어디로 가려했는지..
우리가 지금 멀리 있을지라도 우리가 지금 멀리 있을지라도 이 바람 한 오라기 네게 가닿지 않겠냐아슴푸레한 별처럼 우리의 옛일 들리지 않겠냐 사랑은 곁에 있을 땐 달의 뒷편에 자더니너 먼먼 소식으로 가마득하니이제서야 흰 창에 자옥하다 너를 그리는 밤은 소란하다캄캄하고 청량한 숨소리함께 거닌 해변 위의 발자욱 소리서로의 고독에 입맞추던 소리별이 반짝 빛나던 소리시간이 아무 곳으로나 흐르는 소리나는 소란한 소리들을 담아 겨울 귀뚜라미에게 가져가며누구나 상처는 깊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헤아리려는 것은별의 값을 묻는 것처럼 슬프고 우스운 일이지만아무튼 내 사랑은 대류에 닿지도 못하여빈 골목에서 고작 네 밤길만을 비추었다이 사랑 너무 낮고 불안해 우리는 지구의 공전에 흔들렸을까별들의 사이처럼 서서히 멀어졌을까 그러나..
햇살이 내게 묻는다 햇살이 내게 묻는다 푸른 잎새의 손가락을 간질고 지나는 바람이 가만한 손길로 꽃을 깨우는 봄이 내게 묻는다 바삐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노인의 손수레에 버려진 상자들이 까페 안을 서성이는 노래의 음자리들이 내게 묻는다 4월의 바다가 얼마나 찰지 숨 멎은 친구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 어떨지 믿었던 세상의 먼저 돌아선 등을 보아버린 기분을 나는 모른다 햇살이 내게, 부끄러워 눈을 감았던 내게 소리친다 너는 이 세상에 대해 책임질 일이 없느냐고. 2014. 4. 21. 멀고느린구름
루이제의 바다 루이제, 하고 불러본다이국의 이름이다이국의 별과 이국의 강물이아마도 나와는 상관없을 시절들이그 속에 담겨 있겠다 그러나 루이제, 하고 부르면어째서 내 어린 날의 자맥질과새하얗던 조약돌이 떠오를까연서를 쓰고 있던 너의 눈동자와봄꽃에 걸려 나부끼던 청춘의 깃발이 형형해질까 아름답던 시절들이 흘러가 이룬 바다가이 세상 어딘가에 있으면 좋겠다모래톱 위에 발벗고 서서루이제 루이제, 부르면그저 못 이기는 척돌아간 벗들이 솨아 웃으며 달려오는루이제의 바다가 있었으면 좋겠다 2014. 1. 18. 멀고느린구름. 까페 '느림'에서 * 유키 구라모토가 연주한 '루이제 강'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문득 그 음악을 들으며 우리의 아름답던 시절들이 흘러가 이룬 바다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이 순간 또한 지나갈지라도 언젠가 이 순간 또한 지나가겠지앞서 걸어가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었다가을도 다 가고 겨울이 오던 시점이었다어리석게도 너의 고민을 귀담아 듣기보다너의 얼굴을 마음에 담는 것을 더 중히 여겼다사랑의 시작과 사랑의 끝을동시에 보는 나이가 되어버렸다아니다, 그런 나이는 없었다늙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은시간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일 뿐 영원한 건 없다고 비웃는 것은단 한 번도 영원에 가까운 마음을 품어 본 일이 없다는 고백일 뿐 확정된 것만을 말하겠다고 확정하지 마라 오늘 밤 달의 모습조차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 다만,언젠가 이 순간 또한 지나갈지라도 너를 만나서 반가웠다고마웠다 그리 인사를 남기며 달력을 넘기자. 2013. 9. 17. 멀고느린구름
은하철도 까만 밤이 오면 꿈으로 가는 기차표 한 장 들고 구름 위의 플랫폼서 기다리지 않을래 마음의 철길따라 999호는 오겠지 소년이거나 소녀이거나 한 번쯤 타 올라 창밖의 별들이 예쁘다고 예쁘다고 그러다 피가나고 아물기 전에 자라나겠지 꿈은 꿈일 수 밖에 없다고 어느 별에서도 사랑은 끝나리라고 성숙한 아이들은 저마다의 별에 머물겠지 은하철도는 오늘 밤도 텅 빈 객실만을 싣고 꿈의 정거장에 내리네 기다리지 않을래 믿어보지 않을래 잃어버린 기억 속 은하철도. 2001. 가을. 멀고느린구름. -------------------------------------- 2001년의 내가 아직 저 플랫폼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