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등록금으로 프랑스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버렸다. 당연히 나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다. 제2외국어 과목이 프랑스어이기는 했으나, 수능시험 과목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쳤을리 만무하지 않는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2학년 봄학기 제2외국어 집중 수업 기간이 있었다. 불과 한 학기만에 2년치 프랑스어 수업을 몰아서 진행하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무려 6시간이 할당되어 있었는데, 그나마도 3시간은 사실상 영어 자습 시간으로 활용되었다. 노회한 할아버지 프랑스어 교사는 교단에 서서 프랑스어 교과서를 낭송하고 퇴장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할아버지 교사는 불란서 유학까지 마친 불어의 대가였다. 그가 젊었을 때에는 프랑스어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지식인이라면 불어나 독어 중 하나는..
나는 그해 가을과 겨울을 지나는 내내 ‘거위들’의 노래를 들었다. 수능 시험을 보기 직전까지 내 귀에는 거위들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그저 마음대로 나를 위한 장르라고 생각했다. 보컬인 캐롤라인의 목소리는 겨울 하늘을 닮았다. 투명하고 청아하지만 차가운 슬픔을 품고 있었다. 틈틈이 코러스로 들리는 기타 에르완의 목소리는 그냥 몹시 우울한 고등학생 소년이 아아 정말 우울한 날이야 라고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베이스를 맡은 모르간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그가 밴드 내에서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사람임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캐롤라인과 에르완은 어딘가 비어 있고, 불안정한 인간들이다. 그에 비해 모르간은 정확하고 안정되어 있..
거위들 “이걸 뭐라고 읽어야 하죠?”“룬스. 거위들이라는 뜻이네요..” 중고 음반을 파는 가게의 점원은 자신 있게 말했다. 나는 4천 원에 낯선 외국 음반을 한 장 구입해 가게를 나왔다. 9월의 가운데였다. 바람은 아직 상냥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선배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재수를 하겠다고 수도 서울에 상경한 것은 작년 겨울 수능 결과가 발표된 이후였다. 재수를 선택하지 않아도 수도권의 중하위권 대학에는 입학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왔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선배와 같은 대학교의 캠퍼스를 거닐 수 없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재수를 할 거에요.”“힘들텐데...”“보고 싶어요.”“나도.” 선배는 단지 대화의 흐름에 맞춰준 것 뿐이었는지도 몰랐다. ..
나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한다. 그에 비해 이야기를 마친 김곱단 할머니의 표정보다 오히려 차분하다. 인터뷰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했다. 태양이 아직 중천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가을 하늘은 하루하루 아스라하게 높아져서 태양은 며칠 전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김곱단 할머니는 몸을 일으키더니 부엌에서 감과 포도를 내어 온다. 단단하게 익은 감의 껍질을 깎아내며 담담히 입을 뗀다. 곱단 : 선생님, 놀라셨겠지요. 이 늙은이가 살아온 인생은 그 다음부터는 절망이 반이요, 목숨 부지가 반이었습니다. 내가 이 과도 하나를 손에 쥐게 되는 것만도 40년이 넘게 걸렸지요. 환갑이 되어서야 겨우 용기를 내서 칼을 손에 쥘 수 있었답니다. 매일 매일 밤마다 달콤한 꿈과 함께 그 마지막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
누군가를 용서해본 적이 있나요 곱단은 서둘러 그이를 깨웠다. 그이가 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 이미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직감했다. 곱단은 그이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가는 거예요. 죽더라도 우리 같이 죽는 거예요. 아시겠죠?! 곱단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이는 망설였다. 아니, 그보다는 자기 앞에 닥쳐온 갑작스런 죽음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곱단이 어제까지 알던 그이가 아니었다. 곱단은 흔들리는 그이의 눈빛을 바로잡으려는 듯이 그이의 손을 꼭 맞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밖에서 쿵!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두막집이 우르르 흔들렸다. 그이의 손은 더욱 더 떨렸다. 곱단은 그이를 품에 안고 어린애를 어르듯이 등을 ..
세 번의 밤이 지나고 네 번째 낮을 맞이했다. 아침 공기가 상쾌했고, 예전보다 온기가 서너 겹 더해졌다. 집 밖에서 갖가지 새들의 소리며, 곱단처럼 일찍 잠에서 깬 산짐승들의 발자욱 소리가 부지런히 들려왔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곱단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그이의 앞 머리를 쓸어 정돈해주고 모포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햇살이 서양식 커튼처럼 나무들 사이에 드리워져 있었다. 허밍으로 출처 없는 가락을 흥얼거리며 몇 걸음을 걸었다. 곱단은 이북에 살 적의 일을 문득 떠올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풍금을 사달라고 조르던 일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르면 아버지는 마지못해 사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곱단은 더욱 더 악착같이 억지를 부렸었다. 이제는 아버지가 항복을 선언하고 말겠지..
나는 : 다시 한 번 여쭤보게 되지만… 정말 무섭지 않으셨어요?곱단 : 뭐가요?나 : 아무리 당시 정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말씀하셨어도… 역시 그 분께서 갑자기 돌변해 살인귀가 된다든가, 아니면 정말 소문처럼 도깨비로 둔갑할 수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곱단 : 무슨… 그런 건 외려 뒤에 덧씌워진 겁니다. 외려 그때엔 특별히 그런 건 없었죠. 그냥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러 미래의 모습 중 하나였을 뿐이었어요. 물론, 전쟁이… 사람들의 마음을 갉아 먹었지만… 나 어릴 적만 해도 한 동네에 사회주의 공부한다는 어른들이 여럿 계셨었죠. 전쟁 탓에… 북괴군이니 중공군이니 그런 공산주의를 믿는다는 자들이 일으킨 어리석은 죄 탓에 평범했던 것들을 더 이상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지요. 이 나이가 ..
다섯 번의 낮과 다섯 번의 밤이 지나가는 동안 곱단과 그이가 오두막에서 보낸 시간은 닷새였다. 오두막 속에 있는 것은 그이가 아끼던 세 권의 책과 한 사람 분의 모포, 성냥 한 갑, 소련제 반합, 이 주일 분의 쌀, 고구마 대 여섯 개가 전부였다. 곱단은 특히 세 권의 책과 소련제 반합에 눈이 갔다. 책은 세 권 중 한 권은 소련어로, 한 권은 일본어로, 한 권은 언문으로 쓰여 있었다. 그이는 각각 레닌의 , 나쓰메 소세키의 , 황순원의 라고 소개했다. 그이의 말에 따르면 은 우리가 지향해야할 시대 이념을, 은 마음의 깊이를, 는 민족애를 대변해주는 책이라고 했다. 소련제 반합에 대해서는 간도에서 적군에 가담했던 시절부터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이의 아버지는 소련 적군의 힘을 빌어 무장 강화를 꾀하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