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별을 사랑했지만, 구름정원에 이사 온 후 특히 더 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간단히 문을 밀고 마당으로 나가 캄캄한 허공 사이를 올려다보면 거기에 별들이 빛나고 있는 덕분이다. 별자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 매번 책을 읽어도 금방 까먹고 만다 - 북두칠성의 생김새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어째서인지 구름정원의 마당에서는 북두칠성이 선명히 잘 보인다. 요즘은 내가 기르는 병아리라도 되는 듯이 거의 매일 밤 자기 전에 까막까막 흔들리는 여린 별빛들을 살피고 잠이 든다. 주말 동안 지구에 내려왔던 하나의 별이 또 그만 일찍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음이 무겁다. 허망한 죽음 하나가 더해질 때마다 지구의 중력도 점점 커지는 듯하다. 윤회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 쓸쓸하고, 아프게 떠..
그리하여 11월이 되었다. 앞의 이야기들은 많이 생략되었다. 5월 이후의 시간에 실체가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지난 6개월 속 계절들이 투명한 유령처럼 느껴진다. 내가 알던, 지지와 응원을 보내던 사람들이 벌써 네 사람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 무작정 글을 쓰며 시간을 견뎠다. 덕분에 조금은 나아진 듯하다. 삶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쓰기 시작한 소설 는 어느새 그냥 자기의 이야기를 시작해버렸고, 친구의 조언으로 시작한 회고록은 소소한 관심을 받으며 24년의 긴 인생을 항해 중이다. 내년에 도서관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불안했었는데, 다행히 일단 내년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다. 사랑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삶의 시절이다. 하지만 사랑을 제외하고 나니 아무 것도 그다지..
사람들은 대게 갓 볶은 원두로 내린 신선한 커피가 최고의 맛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맛을 평가하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맛칼럼니스트 같은 분들이 들으면 기함할지도 모르나 맛이란 상당히 주관적인 잣대를 지닌 것이어서 때때로 몇 년 동안 진열장 속에 썩혀 놓은 오래된 원두에서 기막힌 맛이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2015년 즈음에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베트남 커피 가루를 모카포트에 넣고 끓인 뒤, 아메리카노를 제조했다. 녀석은 지금 내 왼편에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점잖을 떨고 있다. 4년 묵은, 게다가 품격이 떨어지는 로부스타종의 커피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겠느냐 싶지만 적어도 어젯밤 내가 참지 못하고 갈아먹어버린 아라비카종의 케냐 AA의 맛보다는 한수 위다..
변명들이 늘어간다. 왜 아직 등단을 하지 못했나? 왜 아직 유명한 인물이 되지 못했나? 왜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나? 왜 아직 재산도 갖추지 못했나? 왜 아직 성격이 그 모앙인가? 세상은 (그리고 나 자신은) '왜 아직 -' 으로 시작되는 수 많은 질문들을 나에게 종종 던진다. 그럴 때면 무엇 하나도 시원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이러쿵저러쿵 정신승리를 위한 변명들을 뒤적거리게 된다. 나를 알아보는 심사위원이 없어서요, 세상 사람들의 취향과 내 취향이 달라서요, 돈도 없고 성격도 나빠서요,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가져본 일이 없어서요, 천성이 그 모양이라서요. 라고 세상의 질문에는 대충 변명을 하고 돌아서지만, 이따금 나 자신이 스스로 던지는 똑같은 질문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
글이 잘 써지지 않는 현상은, 손아귀에 힘이 주어지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2분 내에 팔굽혀펴기 100개를 해내야 한다는 미션을 받고, 단기간에 무리한 근육 운동을 해야 했을 때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1시간 정도의 하드 트레이닝을 마치고 나면 손아귀에 힘이 잘 주어지지 않았다. 주먹을 움켜쥐는 것쯤이야 언제든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그건 뭐랄까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큼이나 확고한 믿음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기분은 묘하다. 물안개가 사방을 뒤덮은 익숙한 거리 위를 걷는 기분이다.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면 손목 즈음에서 형체가 스러지고 마는 안개 속에서는 익숙하다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이내 내 존재에마저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주말 내내 다락방에 누워 글을 쓰고 싶다..
웹에 쓰는 글은 아무 거라도 이미지를 붙여두지 않으면 거의 읽히지 않는다. 덕분에 요즘에 내가 이곳에 쓰는 시시껄렁한 에세이들도 거의 읽히지 않고 있다. 조회수가 10-30 사이다. 일부러 그러는 중이다. 꽤 오랜 세월 읽혀지기 위한 글을 연구해왔다. 어울리는 이미지를 찾고, 검색어에 잡힐 법한 단어들을 제목에 넣고, 화제가 되는 쟁점에 뛰어들어 글을 쓰곤 했었다. 글을 웹식으로 치장하는 일에 이제 제법 능통해졌다. 그러다 작년 무렵부터 글이 글 외의 요소로 읽히는 것에 좀 정이 떨어졌다. 잘 치장한 글이 역시 잘 읽히는 것을 보면 그다지 기쁘지 않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온갖 사람들이 글이란 이렇게 써야 한다고 떠드는 것에도 질려버렸다. 글이란, '잘 읽히면' 그만인 것일까. 잘 읽히는 글을 쓰면 글을 ..
음악감상실에는 언제나 나 한 사람 뿐이었다. 대학생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떠올려 보면 그 음악감상실은 지나치게 성실하게 운영되었다. 언젠가의 추석이었다. 모두가 고향을 향해 떠난 뒤에 난 언제나처럼 혼자 자취방에 반쯤 누워서 왁자지껄해진 주인집 가족들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오래된 단층 구옥의 방 두 개를 자취방으로 내주고 있는 곳이어서 외출을 하려면 반드시 거실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인 할머니는 명절 아침이 되면 늘 내 방을 두드려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거실에 잔치상을 차렸다. 특별히 갈 곳이 없어 명절에도 방바닥에 붙어 있는 것을 구태여 알리고 싶지 않아, 늘 인기척을 내지 않았었다. (그러다 한 번은 내 방문 쪽으로 차례상이 차려진 일도 있다.) 그날도 어김없이 ..
빗소리에 잠을 깼다. 다시 잠들려고 한 시간이나 애를 썼으나 온갖 상념들만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기 시작하는 통에 그냥 이불을 걷었다. 다락방에 누워 있으면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마치 진군하는 군인들의 군화 소리처럼 들린다. 이렇게 쓰면 전혀 낭만적이지 않지만, 남들보다 긴 시간을 군에서 보낸 내게는 미약한 서정의 풍경이 떠오른다. 새 보금자리인 '구름정원'의 다락방은 아름답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름답게 만들었다. 지난 주말과 지지난 주말을 온통 투자해서 몹시 단정한 공간으로 변모시켜놓았다. 다락방에 대한 애정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나는 다락방에서 첫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진정한 의미의 독서 또한 다락방에서 비로소 시작되었을 것이다. 작은 나트륨 전구 하나로 흐린 귤빛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