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깔끔하게 무시당하는 일쯤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니다. 허나 기대가 컸던 만큼 허탈감도 컸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라면 반드시 응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나는 또 다시 동네 꼬마들을 유혹하러 다니는 수밖에 없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 옆에 레모네이드를 내려놓고 조리대로 돌아올 때까지도 사실 기대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다. 조리대로 설거지 해야할 접시들의 산을 보는 순간, 비로소 현실감이 돌아온다. 마치 3년 이상 만나던 남자에게 실연 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유리벽을 바라보며 레모네이드를 금세 다 마셔버리더니 곧 카페를 떠난다. 그가 앉았던 테이블을 행주로 닦으며 조금 눈물을 모집한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내 생일선물을 잘못 사오거나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 오늘도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3번 테이블에 앉아 거리로 난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의 근심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위에 쓴 단 세 가지. 그는 항상 테이블 위에 모자를 내려놓는다. 그 모자가 놓이는 곳은 늘 3번 테이블 위다. 그는 언제나 유리벽 너머만을 바라보다가 주문한 음료가 바닥을 보이면 카페를 떠난다. 음료는 커피를 제외한 모든 음료로, 랜덤이다. 나는 3개월 전 그를 처음 보았지만 먼저 이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일하던 선임은 그보다 3개월 전에 그를 처음 보았다고 했고, 그의 선임은 또 그보다 3개월 이르게 그를 목격했다. 그의 모자는 검은색의 무늬가 없는 중절모로 늘 같은 제품이었다. 모자를 쓰고 있을 때..
겨울바다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1 다희는 천천히 게시판을 훑어보았다. 합격자 명단에서 제 이름을 찾는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다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다. 아래위로 옴작거리던 눈동자가 어느 한 점에서 멈춘다. 없어. 다희는 자기를 지탱해주던 실날 같은 희망이 툭 끊어짐을 느꼈다. 어디선가 함성이 터져 나와 상기된 다희의 귓전을 때린다. 다희는 긴장이 풀려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그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칫 이까짓 삼류대 붙은 게 뭐가 좋다구. 다희는 수험번호가 적힌 종이를 바람결에 구겨 보내고, 두꺼운 코트를 비집고 들어오는 한기를 물리치기 위해 몸을 잔뜩 옹그렸다. 집으로 향하는 좁다란 오르막길은 저녁 어스름에 묻혀 오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떻게 됐니, 붙었어? 낡아서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 하는 거 이제 지긋지긋해! 여인 1이 여인 2를 향해 외쳤다. 까페에 앉은 사람 중 누구라도 그녀들이 앉은 자리를 돌아봤을 법한 크기의 목소리였다. 다만, 지금은 그녀들 외에는 나밖에 손님이 없었다. 아무튼 한 번 자기 이야기를 들어봐달라는 신호인 것 같아서 귀를 기울였다. 특별히 읽고 있는 신인작가의 소설이 실례가 되기에 두 손 두 발을 못 드는 게 원통할 정도로 재미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아, 그런데 두 손 두 발을 다 들며 상당히 꼴불견인 상태가 되기는 하겠다. 정확히 말해 내 몸매는 팬더과가 아니라 사마귀에 가깝기 때문에 그 광경은 더욱 참혹할 것이 틀림 없었다. 여인들의 대화는 빠르게 이어졌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누군데?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쓰리포인트 슛 (Three Point Shoot) 1.시합은 무슨 시합이냐, 인생 자체가 시합인데 또 시합을 해? 무더운 여름이었다. 길가다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더위사냥을 사먹는 것만으로 무한한 희열을 느낄 것만 같은 여름. 따르릉. 전화가 왔다. 최대리는 부스스 눈을 떴다. 방안에 엷은 햇살이 퍼져 있었다. 일요일인지라 좀 더 푹 자고 싶었던 그는 조금 짜증을 느끼며 수화기를 들었다. -야 나야 아직 자냐. 이런 굼벵이 같은 놈. 야, 나와라. 오늘 한 판 뜨자 최대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농구에 환장한 놈, 몇 시냐 지금이! 최대리는 수화기를 내던져 버렸다. 머리가 띵했다. 어제 회식자리에서 마신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속 편히 농구 따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일까지 처..
섬집 아이 통영에서도 또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하는 조그만 섬. 선착장에서도 한참을 에돌아 들어와야 하는 곳에 먼 타지서 상처와 그리움만을 안고 흘러와 사는 이들이 있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빚쟁이들을 피해 숨어든 사람, 어떤 수를 써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미혼모들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영감을 가진 가난한 시인도 있었다. 대부분 섬 가운데 오똑 솟은 산의 산비탈에 조그만 밭을 일구고, 틈틈이 바다로 나가 낚시질을 해서 살아갔다. 아이가 있는 집은 대부분 아이 혼자 집을 보는 경우가 많아서, 밖에서 아이들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의 서글픈 사연의 숨소리와 공백한 바닷소리를 듣고 자라는 아이들은 일찍 외로움을 배웠다. 아이들은 외로우면 어머니로부터 배운 '섬집..
물망초 프롤로그 푸르던 잎사귀들은 어느새 붉은 빛으로 물들고, 외로운 영혼들은 바람에 휩싸인 채 떨어져 내립니다. 하늘은 내가 거니는 땅과 별개인 것을 자랑하듯 저만치 아득히 떨어져, 멀게만 보입니다. 나의 가을날도 어느새 스물 한번 째... 난 온몸을 감싸 도는 싸늘한 옷깃을 여미며, 분분한 낙엽사이를 거닐고 있습니다. 가을이라 그런지 너무 외롭네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즘 자꾸만 기억 속의 작은 그 소녀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맴 돕니다. 저기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나를 보며 미소 짓습니다. 작은 코스모스에 그 소녀의 얼굴이 비칩니다. 나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감돕니다. 그리곤 꿈처럼 달콤하게 내 작은 추억 속으로 나의 기억은 흘러듭니다. 소녀와 나 내일이면 난 엄마 곁을 떠나 수학여행을 가야한다. ..
말해질 수 없는 것 바로 이때다. 해는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잠겼다. 뒷 편의 아파트에서 일제히 형광등이 켜졌지만 해변의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남자는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희미한 윤곽만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이때가 아니면 영원히 기회는 오지 않겠다는 직감. "나 있잖아..." "어 왜?" 여자의 목소리에 바다가 잔뜩 베어 있다. 쏴아 밀려가는 썰물 소리에 말문이 막힌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몰라, 한 10년 됐나." 기억나지 않는 말을 남자는 이어간다. 여자는 남자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일에 관심이 없다. 여자는 무엇에 관심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