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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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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희는 천천히 게시판을 훑어보았다. 합격자 명단에서 제 이름을 찾는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다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다. 아래위로 옴작거리던 눈동자가 어느 한 점에서 멈춘다. 없어. 다희는 자기를 지탱해주던 실날 같은 희망이 툭 끊어짐을 느꼈다. 어디선가 함성이 터져 나와 상기된 다희의 귓전을 때린다. 다희는 긴장이 풀려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그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칫 이까짓 삼류대 붙은 게 뭐가 좋다구. 다희는 수험번호가 적힌 종이를 바람결에 구겨 보내고, 두꺼운 코트를 비집고 들어오는 한기를 물리치기 위해 몸을 잔뜩 옹그렸다.
집으로 향하는 좁다란 오르막길은 저녁 어스름에 묻혀 오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떻게 됐니, 붙었어? 낡아서 여닫을 때마다 기괴한 괴성을 질러대는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희의 엄마가 물었다. 다희는 고개를 폭 떨군 채 가만히 머리를 흔든다. 다희의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일상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갔다. 괜찮아, 아직 기회는 많이 있잖니. 다희는 이런 상투적인 위로의 말조차 건네주지 않는 엄마에게 야속함을 느꼈다. 다희는 공부중이라는 문구가 허상처럼 붙어있는 제 방문을 열고 마린 블루 빛깔의 침대에 몸을 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는 슬픔으로 젖어들었다. 다희는 앞으로 펼쳐질 제 삶에 대해 떠올린다. 졸업식 날 학교에 가지는 못 할거야, 친구들은 날 바보 취급할 테지, 난 이제 학원에 다녀야 해, 아니, 그럴 순 없어. 수강료 부담 할 수 있어?
다희는 고개를 들었다. 책상 위에 붙여 놓은 ‘하면 된다’ 라는 글귀가 흐릿하게 비춰졌다. 뭐야, 그럼 난 안 했어? 다희는 신경질적으로 글귀를 뜯어버린다. 아얏! 그러다가 우연히 책상 모서리에 팔이 긁혔다. 벗겨진 하얀 피부 틈새로 피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다희는 제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계속 흘러버려. 거실에 켜둔 TV에서 귀에 익은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오늘 오후 다섯 시 이십 분 경에 모고등학교 학생 김양이 자신의 수능성적이 낮은 것을 비관 아파트 십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뉴스앵커의 사무적인 음성이 다희의 귓전을 혼란스레 맴돌았다. 다희는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기라도 한 듯 허공 속에 시선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내적 갈등이라도 겪는 것 마냥 크고 동그란 눈을 방의 이곳 저곳으로 굴려보는 것이었다. 다희는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형광등의 오프 스위치를 단호히 눌렀다. 그래, 죽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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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희는 만원짜리 지폐 두 장과 천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 든 지갑만을 호주머니 속에 눌러 넣은 채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새벽녘의 호젓한 바람이 다희의 두 뺨을 날카롭게 스쳐지나간다. 현실은 차가운 바람 같은 거야, 차고 허무해... 다희는 열 아홉 소녀다운 감상에 젖어들었다. 감상의 주제는 삶, 허무, 죽음, 고독 따위의 지극히 추상적이고도 진부한 것들이었다. 다희는 제 나름대로의 논리로 삶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제 죽음을 정당화시키려는 무의식의 자기합리화작용 같은 것이었다. 버스가 왔다. 다희는 버스를 그냥 보낸다. 망설이는 것이다. 다희의 내면 깊은 곳에서 ‘넌 너무 염세적이야’ 라는 친구의 말이 아련히 들려왔다. 내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걸까? 다희는 자신에게 냉정히 물었다. 다시 버스가 왔다. 다희는 마치 햄릿처럼 고뇌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학생, 안탈 꺼야?
예? 예 네.다희는 마법에 걸린 듯 버스에 올랐다. 그 것은 정말 마법이었다. 아직 삼십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름 모를 한 타인의 말 한마디로 제 운명을 결정짓다니... 이윽고 문이 닫혔다. 버스는 다희의 삶을 버스정류장에 추억처럼 남겨두고 종착지를 향해 달려갔다. 그래, 이 걸로 된 거야. 다희는 창 밖으로 스치는 도시의 음영들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으로 친구의 말이 유령처럼 떠올랐다. 기집애, 넌 너무 염세적이야, 세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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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희가 바다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뛰어 내리는 건 너무 진부해, 좀더 낭만적이게 아무 흔적도 없이 죽을 순 없을까? 다희는 눈물로 얼굴을 떡칠한 상황에서도 보다 아름다운 죽음을 구상했다. 그래, 바다야. 그 푸른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거야. 타이타닉처럼. 그래서 결국 바다와 함께 물결치며, 넘실거리는 거야. 다희는 무슨 커다란 발견이라도 한 듯 감탄했다. 그때 다희의 머리 속엔 죽음이란 단어의 현실적 의미가 잠시 지워져 있었나보다.
다희는 역에서 버스를 내렸다. 역은 아직 이른 시각이라 한산했다. 다희는 정동진에 가리라 마음먹었다. 정동진.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하는 곳이 아니던가. 허나 오늘이 12월 31일이라는 사실이 다희의 설레는 마음에 쿵 못을 박았다. 다희는 매년 이맘때쯤 정동진에서 한해의 시작을 알리는 찬란한 일출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정동진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치, 그깟 해돋이 뭐 볼게 있다구. 다희는 속으로 투덜대며 정동진행 기차표를 끊었다. 첫차의 출발은 6시53분이었다. 다희는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게 지루하다고 생각되어서 표를 내고 플랫폼에 들어섰다. 가없이 이어진 듯한 까만 레일이 다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레일 아래로 널려있는 조그만 돌멩이들은 새벽 어스름에 물들어 크리스탈 조각처럼 은은한 느낌을 연출했다. 다희는 문득 레일 위를 걸어보고 싶다는 낭만적 충동이 일었다. 사십 분이나 남았는데 뭐, 괜찮겠지. 다희는 역장의 눈치를 살폈다. 역장은 피곤한지 졸고 있었다. 다희는 기회다 싶어 레일 위로 뛰어 내렸다. 발에서 달그락하며 돌멩이들이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정겹다. 다희는 행여나 역장이 잠에서 깨었을까봐 흘끗 역장 쪽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자고 있다.
다희는 레일을 따라 거닐었다. 이걸 따라 가면 세상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다희는 주위 풍경이 연출하는 서정적 분위기에 도취되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다희는 새뜻한 새벽공기를 호흡하는데 정신을 잃어 제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 지도 망각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무언지 짙은 향수를 느끼게 하는 기차의 바퀴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헥! 지금 몇샤?! 7시 정각. 다희는 역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다희의 바로 옆으로 기차가 요란한 바퀴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다희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아저씨! 멈춰요! 하지만 기차가 다희의 간절한 외침을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기차는 다희의 몸을 가로질러 레일의 소실 점을 향해 사라져 갔다. 다희는 망연한 표정으로 기차가 스쳐 지난 공허한 레일 위를 바라본다. 또, 놓쳐 버렸어. 다희는 무의식 중에‘또’라는 접속어를 사용한다. 이 접속어의 의미는 기차를 놓쳤다는 현상의 되풀이를 의미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다희는 제 삶에서 놓쳐버린 또 하나의 기차, 대학에 대한 생각을 의식의 저편에 아무런 제어장치 없이 팽개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지? 다희는 난감했다. 얼마 전까지 지극히 서정적이고 낭만적이게만 느껴졌던 이른 아침의 어스름, 가없는 레일과 크리스탈빛 돌맹이들. 그 모든 풍경들이 이제는 불안과 초조로 둔갑해 다희를 낯선 땅에 던져진 이방인으로 내몰았다. 다희는 문득 집에 두고 온 일기장이 떠올랐다. 일기장에 뭐라고 썼지? 다희는 어제 일기장에 ‘나는 바다로 갈 것이다. 그래서 그 푸른 바다와 하나가 되어 영원히 물결칠 것이다’ 라고 썼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는 것이 아닌 사라지기를 원했던 한 낭만적 소녀의 꿈을 산산이 깨뜨릴만한 결정적 단서를 다희는 제 스스로 제공하고 떠나왔던 것이다. 바보! 바보! 다희는 흥분한 나머지 마음속으로만 화를 낸다는 것이 그만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봐, 바보!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다희는 정말 꿈인가 싶었다. 그러나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듯 그 낯선 목소리는 좀더 크고 분명하게 다희의 귀 속으로 들어왔다. 병약하고, 낮은 것이 음침한 데가 있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여기야, 여기! 다희는 시선을 이리저리 던져 보았다. 그러다가 깊은 어둠이 채곡채곡 쌓여 있는 맞은편 화물열차의 열려진 틈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칠흑 속에서 사람의 실루엣 같은 게 환영처럼 아련히 보였다. 누...누구세요? 너 기차 놓쳤지. 칠흑 속에서 누군가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다희는 정체 모를 대상에 대한 공포와 초면에 반말을 서슴지 않는 무례한에 대한 못마땅한 감정의 교차로 인해 약간 신경질적인 심리 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리와 봐. 다희는 그 괴한의 말에 전혀 따르고 싶지 않았으나 의문의 대상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는 척 했다. 다희는 한발 한발을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화물칸과 다희의 거리는 점차 좁혀져 간다. 이제 한발자국만 더 가면.......꺄악! 순간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 다희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보기 좋게 나자빠졌다. 으하하하. 화물 칸 속에 들어앉은 괴한은 다희의 겁에 질린 모습을 보며 포복절도하는 것이었다. 다희는 그의 웃음소리에 휩싸인 채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너 누구야! 다희는 꾹 참았던 감정을 격정적으로 토해낸다. 니가 알아서 뭣하게. 괴한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이 배어 있다. 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우연히 제 손 바닥이 벌겋게 물들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아! 다희는 상처를 목격하자 그제야 가벼운 비명을 지른다. 으레 남자들은 여자들이 다치거나 하면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강한 보호의식을 느끼기 마련. 이 괴한도 예외는 아닌지 목소리의 음량을 파격적으로 줄이고 나직이 물었다. 괜찮아...? 다희는 괴한을 끌어낼 심산으로 ‘아니, 많이 아퍼’ 라는 말을 아까보다 약간 강도 높게 아야~ 하고 한번 더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표현한다. 물론 말꼬리를 길게 잡아 빼며 여운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괴한은 의외로 순진했던지 화물차 칸에서 폴짝 뛰어내려 다희에게 다가왔다. 어디 봐, 다희는 괴한이 각본대로 다가오자 따귀를 때리는 것으로 배정된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낸다. 저질! 보기 좋게 카운터를 얻어맞은 괴한은 득의 양양한 다희를 내려다보며 넋 나간 표정이다. 허나 곧 표정을 바꿔 다희의 상처난 손을 붙잡는다. 많이 다쳤구나. 오히려 다희 쪽이 얼떨떨해진다. 손 치워! 뭐야! 지금 나 데리고 놀겠다는 거야! 다희는 괴한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본다. 괴한은 어스름 때문인지 창백하고 병약한 얼굴에 쌍꺼풀이 없는 조금 큰 눈과 지적으로 뵈는 눈매를 가지고 있었고, 두꺼운 입술엔 어울리지 않게 생기가 없었다. 의외의 괴한 치곤 제법 준수한 용모가 아닌가. 괴한은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반창고 하나를 꺼내 다희에게 건넨다. 붙여. 다희는 병주고 약 준다는 식의 기분을 쉬이 떨쳐버릴 수는 없었으나 상처가 쓰라렸기에 한발 양보하기로 한다. 넌 어디로 가? 다희는 대답하지 않는다. 난 정동진 가. 다희는 정동진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 한다. 그러나 무심한 척, 기차 떠났잖아. 손 흔들어도 소용 없다구. 기차? 여기 있잖아, 여기. 괴한은 화물열차를 탕탕 두드린다. 그걸 타구? 괴한은 말없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너 정동진 가지? 다 아니까 순순히 털어놓으라는 식의 말투다. 뭐, 일단. 다희는 세침맞게 대답한다. 역시, 그럼 타. 타? 어딜? 거기? 다희는 순간 또 갈등한다. 타야하나 말아야하나 만약 저걸 타지 않으면 부모님께서 금방 여기로 달려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거야. 그렇다고 저 걸 타면 저 이상한 애하고 몇 시간이나 계속 같이 있어야 하잖아. 으 끔찍해. 다희는 쉽사리 선택하지 못 했다. 하지만 언제나 삶을 이끄는 것은 어떤 우연이다. 기차의 바퀴소리가 철커덩 덜커덩거리며 화물차가 서서히 플랫폼을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타! 괴한은 다희의 손을 잡고 화물차 칸에 훌쩍 올라탄다. 다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은하철도 출발합니다~! 명현이 이죽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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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한은 자기 이름은 명현이고 나이는 열 아홉이며 어디서 무슨 학교를 다녔으며, 취미는 뭐다, 특기는 뭐다, 좋아하는 음악, 책, 영화, 가수 등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다희 앞에 보따리 보따리 풀어놓았다. 총 소요시간은 약 한시간 반 가량. 나중에는 듣고 있는 다희 자신이 용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다희는 묻지도 않은 것을 제 스스로 흥에 겨워 줄줄이 실토했던 것이다. 남자애가 무슨 말이 저리 많담. 다희는 혼자 중얼거린다. 남자는 말 많으면 안 돼? 너 되게 보수적이다. 어떻게 들었는지 명현이 반박한다. 유치해. 뭐가? 으유! 다희는 어둠 속에서 몸을 돌려 나무상자에 기댄다. 피곤했다. 넌 왜 정동진에 가지? 명현이 다시 말을 꺼냈다. 정동진에 가는 게 아니고 가장 가까운 바다를 찾은 거야, 바다에 가려고. 바다? 여행가나보지, 혼자. 아니. 그럼 뭐야? 죽으러 가. 죽으러? 거 되게 살벌한 농담이다. 농담 아냐. 다희의 말투는 시니컬하다. 명현은 다희가 진심임을 깨닫는다. 왜? 에? 왜 죽을려고 하냔 말야. 명현의 목소리가 조금 격해진다. 살 이유가 없어서. 그으래? 명현은 말을 고의적으로 일그러뜨린다. 넌 대학에 붙었지? 다희는 내심 ‘아니’라는 말을 기대한다. S대. 다희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지고 기대의 파편들이 되려 다희의 가슴에 꽂힌다. 다희는 말을 잊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야. 명현은 좀 전의 분위기를 일소하고 시니컬해진다. 치, 들어갔으니깐 그런 말이 나오지. 명현은 무슨 일인지 말이 없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캄캄한 열차 속은 한껏 오솔해진다. 명현은 열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오래 기다렸다는 듯 햇살이 서둘러 열차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아득한 지평선까지 초록빛 대지가 펼쳐졌다. 어느새 어스름은 걷히고, 싱그런 햇발이 대지 곳곳에 손을 내밀었으며 상쾌한 바람은 나무, 풀, 낙엽, 흙 알갱이, 이런 것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너무 멋지다. 낭만적이야. 우리의 로맨티스트 다희는 역시 낭만적이란 말을 빼놓지 않는다. 명현은 다희를 보며 씩 웃었다. 대학이란 거 아무래도 좋다구 생각해, 물론 나오면 좋겠지. 하지만 대학은 도구일 뿐이야.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작은 도구.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대학이란 도구를 쓸 필요 있을까? 대장장이는 망치를 도구로 쓰고, 화가는 붓을 도구로 쓰잖아. 그렇게 직업에 따라 알맞은 도구가 있듯이, 삶에도 저마다 알맞은 도구가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너무 한가지 도구에 얽매여 있어. 그리고 그것이 도구일 뿐이라는 것도 잊고, 마치 그게 전부인양 인생이, 우리의 삶이 모두 거기에만 있다는 듯. 우리의 삶에 비하면 대학 몇 년간의 시간은 정말 작은 것인데 말야. 웃겨, 웃기는 일이야. 다희는 명현의 말을 안 듣는 척하며 온 신경을 집중시켜 듣고 있었다. 그래두, 우리 사회에선 대학 안 나옴 사람 취급도 안 해주는 걸.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집에선 식충으로나 여기고, 대학 불합격은 곧 인생 불합격이라구. 명현은 다희께로 얼굴을 돌리며 능글맞은 표정을 짓는다. 너, 대학 떨어졌어? 하하. 이제 보니까 증말 바보네. 이윽고 명현은 이죽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다희는 그 웃음이 쉽사리 그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면서, 좀 전에 가졌던 명현에 대한 일말의 좋은 감정을 싹 지워버렸다. 그리고 상자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호젓한 바람이 다희의 코를 스쳐지나 얼마간 다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훌쩍 떠나갔다. 추워...명현은 제가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다희의 몸 위에 포갠다. 바보... 넌 살아야 해... 명현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명현은 열차 문가로 다시 돌아가 주머니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삼키고는 풍경 속에 시선을 묻는다. 그토록 빠르게 달려가는 열차 속에서 바라보는데도 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변함없는 웃음을 간직하고 있다. 바람이 스쳐도, 먹구름이 몸을 집어 삼켜도 해는 언제나 그 자리이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싱글벙글이다. 명현은 해이고 싶었다. 그 어떤 삶의 시련이 닥쳐도 항상 밝게 웃는 사람이고 싶었다. 명현은 해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어느새 해는 오렌지 빛으로 포장된 마지막 선물을 대지에 흩뿌리며 잠들어 간다. 해는 내일 다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웃을 것이다.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잠시간의 휴식일 뿐... 죽기 싫어...명현이 잠결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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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현이 귓가를 베고 지나가는 바람에 눈을 떴을 때, 풀벌레 소리만이 나지막이 들려오고 주위는 어둠뿐이었다. 다희는 아직 자고 있다. 야, 일어나. 다왔어. 다희는 손을 휘저으며 일어나기 싫다는 거부의 몸짓을 보인다. 엄마, 쬐금만 더... 명현은 다희의 그런 행동이 앙증맞다고 느꼈다. 그럼 나 혼자 간다아. 명현은 다희의 귀에 대고 외치고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화물열차에서 뛰어내렸다. 바람이 찼다. 명현은 몸을 잔뜩 옹그리고 부러 달그락 소리를 내며 천천히 걸었다. 그제서야 다희는 제가 처해 있는 현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 어댜? 다왔어, 정동진야. 벌써? 다희는 제 여행의 목적을 망각한 듯 기뻐하며 열차에서 폴짝 뛰어 내렸다. 다희는 문득 제 몸에 걸쳐져 있는 명현의 옷을 보았다. 명현은 추운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얘, 이거. 명현은 다희에게 제 옷을 받아 재빨리 입었다. 마음은 그 옷을 다희가 입는 것을 허락했지만 육체는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명현은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것 같았다. 허나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순 없다는 생의 의지가 명현을 지탱했다. 정동진인데 왜 바다가 안 보여? 너, 처음 오는 거야? 응. 바보, 정동진은 여기서 버스 타고 삼십 분쯤 가야 돼. 다희는 바보라는 말에 발끈했다. 너, 아직도 죽을 거야? 다희는 순간 아득해졌다. 죽어버릴 거라고 결연한 각오를 하고 집을 나섰건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각오는 희석되어 거의 형체를 알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 사는 게 좋아. 명현은 다희의 침묵을 생의 의지라고 단정지어버린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다희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니, 난 죽어. 정동진이 어느 쪽이니? 명현은 죽음을 너무나 쉽게 결정짓는 다희에게 염증을 느꼈다. 그래, 니 맘대로 하거라. 아가야. 뭐어? 다희는 화가 났다. 자신의 깊은 고뇌의 결과가 명현에게 가볍게 여겨진 것에 기분이 상한 것이다. 좋아, 나 혼자 가지! 다희는 면접 시험장으로 향하는 사람처럼 제법 비장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이, 바보! 정동진은 이쪽야! 다희는 얼굴이 벌개져서는 방향을 틀었다. 흥! 다희는 소녀다움을 드러내는 새침한 콧방귀를 뀌며 명현의 몸을 가로질러 짙은 어둠 속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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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어둠이 내린 길가의 침묵 속을 걷고 있었다. 동그란 달이 손에 잡힐 듯 아슬하게 둘의 머리 위에서 노란 커튼을 드리우고, 소음이 잠든 거리 위에는 풋풋한 귀똘이의 울음과 서로 몸을 부비는 풀들의 정겨운 사그락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따금 공기가 잘리는 소리와 함께 두개의 광체가 둘의 곁을 스치기도 했지만 밤이 주는 은근한 평화를 깨뜨리진 못했다. 다희는 무서웠다. 건전지가 다 닳아 손전등마저 꺼진 지금, 앞에 보이는 건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것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건 다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허나 내심 다희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지 그래. 명현이 암묵적 침묵의 약속을 깨고 먼저 말을 꺼냈다. 싫어. 다희는 단호히 잘라 말하는 것으로 제 마음을 굳힌다. 명현은 이제 될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넌 왜 정동진 가니? 무언가 어색한 모양이었는지 이번에는 다희가 수줍게 묻는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도시에서만 자란 애들이 가지는 동경, 죽기 전에 한 번 바다는 봐야지 하는 것 같은. 헤에 그러니까 한 번도 바다 못 가봤다는 말? 그…그렇지 뭐. 핏, 누가 바본지 모르겠네, 저기…근데 야 여기 정말 정동진 맞아? 음… 잘 모르겠는 걸.
다희는 온 몸의 힘이 축 빠지는 것 같았다. 이제와서 저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이냐. 야 너 죽어! 다희는 살기 등등한 눈으로 명현을 노려보았다. 어머 숙녀분께서 그런 천박한 말을. 명현은 또 이죽거리며 받아친다. 깊은 어둠은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깬다.
어느새 산 마루터기로 흘러간 동그란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한 창 전화의 불꽃을 태우고 있는 두 사람 뒤로 긴 달 그림자가 졌다. 달이네. 명현이 말했다. 다희도 뾰로퉁한 얼굴로 산마루터기 쪽을 바라본다. 동그란 얼굴 그득 동그란 달빛이 쏟아진다. 와… 다희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 참 그렇게 달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새 명현은 생각했다. 달빛과 달 그림자, 빛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곳으로 걸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둡고 슬픈, 그리고 긴 달 그림자를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빛, 생명, 어둠은 하나로 이어진 것, 필연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그건 탄생, 살아감, 죽음이 하나로 이어진 삶인 것과 같지 않을까.
야야, 저기 봐봐. 다희가 못 볼 것을 본 양 더듬거리며 손가락으로 달 쪽을 가리켰다. 토…토끼? 명현은 자기 눈이 침침해진 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달께를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달에는 선명하게 토끼의 실루엣이 찍혀 있었다. 서…설마아 저거 말로만 듣던 절구 토끼는 아니겠지. 다희가 물었다. 그…글쎄. 순간 달로부터 별똥별처럼 조그만 빛줄기가 쪼르르 떨어져 내렸다. 노란 빛은 반딧불처럼 오련히 하늘거리며 보드랍게 주변의 밤 하늘을 적시고 있었다. 가보자. 에? 어디로. 토끼 별이 떨어진 곳 말이야. 명현은 말이 끝나자마자 달음질이었다. 다희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혼자 있는 건 무서웠으므로 명현을 따라 달렸다. 달에 찍혀 있던 실루엣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7
얼마나 달렸을까. 둘은 멈춰 섰다. 숨이 차올라 헐떨헐떡 댔다. 둘의 어깨는 파도처럼 들썩였다. 바다였다. 둘은 자갈밭에 풀썩 주저 앉더니 그대로 드러누워 버린다. 등 뒤로 느껴지는 차가움, 귓가를 지나는 파도소리, 코끝을 스치는 시린 바다바람, 그리고 눈 앞의 하늘, 까만 우주. 둘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 토끼별 여기쯤 떨어진 거 아닌가? 명현이 말했다. 바보 같아! 야, 토끼가 어떻게 떨어져, 거기서 떨어졌으면 벌써 추락사 했겠다. 다희는 자신에게 생고생을 시킨 명현이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큭! 갑자기 명현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왜..왜 그래? 야아. 놀란 다희는 벌떡 일어나 앉아 누워 있는 명현을 내려다 본다. 악! 명현은 이를 악물고는 제 가슴을 쥐어 뜯을 것 처럼 쥐고는 신음했다. 야! 야! 왜..왜 그러는데에?! 장난치면 죽어 너! 다희는 어찌할 줄을 몰라 안절부절이었다. 무..물 좀. 물? 다희는 허둥지둥 바다 물을 두 손에 담아 온다. 그 사이 명현은 힘겹게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더니 입에 털어넣었다. 뭔가 자기가 물을 먹여 줘야 할 분위기라는 것을 직감한 다희는 두 손을 명현의 입가로 가져갔다. 명현이 입을 벌렸다. 다희는 조심스레 물을 흘려넣었다. 겨우 안정이 된 것은 명현이 약을 먹고 1분 가량이 지나서였다. 어떻게 된 거야? 묻지 말아 줄래.
그렇게 둘은 또 밤의 고요와 바닷가의 파도소리 속으로 묻혀져 갔다.
저기요… 길을 잃었는데, 달 나라로 돌아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어느 한적한 바닷가 자갈밭에서 달에서 떨어진 말하는 토끼를 보았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정신병원으로 가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명현과 다희에게 말을 걸어온 빨간 눈에 하얀 털을 지닌 생물은 분명 토끼였다. 하지만 이 토끼는 지구에 사는 토끼와는 달리 두 발로 서 있었고, 앞 다리 뒷다리가 아닌 팔과 다리가 있는 말하는 토끼였다. 그리고 노랗게 반짝이는 하얀 초생달 그림이 붙은 보라 빛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이었다.
에구, 근데 여기는 참 어둡네요. 달에서 볼 때는 내려오면 아주 파랄 줄 알았는데요. 음음 저기 두 분다 제 말을 못 알아 들으시나 봐요. 에구 죄송해요. 그럼 이만. 토끼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를 하더니, 돌아서서 뒤뚱뒤뚱 걸어 갔다. 두 발로. 명현과 다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잠깐 토끼야! 다희가 소리쳤다.
8
토끼의 이름은 '달이' 였다. 달 나라에서 절구를 찧다가, 좀 쉬면서 지구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만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는 게 달이의 설명이었다. 명현과 다희는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눈 앞에 이미 믿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데 무엇을 믿지 못할까. 사람들은 다들 눈으로 보는 것은 모두 진짜야라고 믿는 것이다. 다희는 달이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근데 정말 달 나라로 돌아가는 길을 모르시는 거에요? 명현과 다희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알 리가 없지 하는 눈짓이다. 우린 달 나라 토끼가 우리 앞에 있다는 것부터가 너무 놀라워. 명현이 자못 진지한 투로 말했다. 다희는 지적인 채 하는 명현이 싫었지만 그럭저럭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달에는 혼자 사는 거야? 다희가 호기심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었다. 토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옛날에는 달 나라에도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말하길 달은 지구의 위성으로 형제 별이라고 하잖아요. 사실 그 말이 맞아요. 달은 지구의 다른 모습이죠. 지구에서 죽은 생명들은 모두 그 영혼이 달로 이주해 오게 되어 있어요. 달로 이주해 온 영혼들은 저 같이 토끼의 모습을 한 육체에 자리를 잡게 되지요. 즉 우리 달 토끼족들은 지구에서 온 영혼들의 다른 모습인 거에요.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달에는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었지요. 그건 어떤 혜안을 지녔던 고대문명의 현자가 유체이탈을 해서 저희 세계를 한 번 다녀가고 난 후 지구의 사람들에게 알렸던 것이지요. 그 전설이 와전되어서 지구에는 유토피아, 엘도라도, 무릉도원 같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지요. 근데 그것은 옛날하고도 아주 먼 옛날의 일이라, 사람들은 이제 그 이야기를 그저 신화나 지어낸 동화 정도로만 생각하게 되었어요. 에구, 게다가 지구 별의 아폴로라는 우주선이 달의 표면을 다녀가고 난 뒤로는 사람들은 우리의 존재를 아예 믿지 않게 되어버렸지요. 사람들의 꿈에서 달 나라 토끼는 영원히 설 자리를 잃어버린 거에요. 달 나라는 영혼들의 세계이자 꿈 속의 세계예요. 사람들이 꿈의 눈으로 보지 않고, 현실의 눈으로 우릴 바라보려 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거에요.
그렇구나아, 근데 그 많다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너 혼자 남은 거야? 다희와 명현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풋 하고 살짝 웃는 두 사람. 달이는 하얀 발을 바닷물 속에 살포시 담가보며 몇 번인가 자맥질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비극은 아폴로 우주선의 달 탐사 이후부터였어요. 탐사원들이 달에는 토끼가 살지 않는다고 보고를 하면서, 사람들은 달 토끼에 대해 꿈꾸지 않게 되었어요. 달의 세계에 오려면 기본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달 토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거든요.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모두 믿음을 잃어서 아무도 이 땅으로 오지 않고 있어요. 함께 있던 토끼들은 여기서의 생애를 마쳐 다시 지구로 돌아간 뒤, 오지 못해요. 다들 꿈을 꾸지 못하게 되었거든요. 달에서 지구로, 지구에서 달로, 다시 달에서 지구로 이어지던 영혼의 여행은 이제 그 순환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어요. 지구에서 죽은 생명들은 이 곳에 오지 못하고 모두 귀신이 되어 지구를 떠돌고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너만 남아 있는 거야? 너는 지구로 돌아오지 않는 거야? 저에게는 마지막 달 토끼로서의 임무가 있거든요. 그래서 지구로 돌아갈 수 없어요. 임무? 절구방아를 찧는 거에요. 절구방아는 달을 빛나게 하는 동력원 같은 것이 거든요. 영혼을 지닌 생명이 그 방아를 계속 찧어 주어야 달이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어요. 달이 빛을 잃으면 지구의 밤은 암흑으로 뒤덮이고, 생명은 하나 둘 죽어 갈 거에요. 달 토끼들이 많을 적에는 하루 10분씩 돌아가면서 방아를 찧었는데, 지금은 저 혼자 그 일을 하다 보니 너무 힘들어요. 달이의 얼굴에 환한 빛이 조금 걷히고, 어두운 그림자가 비꼈다.
근데 달빛이 없어도 지구에서는 전구나 형광등 같은 게 있어서 별 문제 없는 거 아냐? 다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보야, 그런 빛은 근본적으로 생명에게 에너지를 공급하지는 못하는 거라구. 명현이 한심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발끈하는 다희. 얼굴이 붉어진다.
핏! 꿈이니 뭐니 그런 걸 믿어 봤자 밥이 나와 돈이 나와! 다희가 시큰둥하게 바다를 보며 소리쳤다. 달이와 명현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지났다.
다희씨는 꿈이 뭐에요? 달이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다희는 머뭇머뭇 거리며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 달이가 초승달 마냥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다희를 향해 고조곤히 얘기한다. 달 나라에서는 지구에서 꿈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 와요. 지구에서 그 꿈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마음 깊은 곳에 그것을 잃지 않고 간직했던 이들이 이곳에 와서 그 보석 같은 꿈들을 펼쳐보여줘요. 그래서 달은 그렇게 노랗고 환하게 빛날 수 있었던 거에요. 그 꿈의 보석들이 달 나라 이곳 저곳에 융단처럼 깔리고, 그 위에서 우리네 달 토끼들은 사랑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재밌는 이야기들을 나누었지요.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해둔 꿈은 이곳 달 나라로 오는 기차표에요. 절대 잃어버리지 마세요 그러니. 꿈은 우리 꿈의 나라에서 활짝 꽃 피워질테니까요.
으…응…다희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명현이 그런 다희를 보고 피식 웃는다. 달이도 노랗게 미소 짓는다. 순간 짙은 어둠이 확 걷히고, 황금 빛 물방울들이 온 대지와 바다와 하늘을 뒤 덮는 것 같았다.
명현은 꿈을 꾸었다. 다희는 깊이 잠들어 버렸다. 달이가 명현을 향해 빙긋 웃었다. 명현은 외투를 벗어 다희에게 주었다. 하얗게 질린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얼굴도 달 토끼처럼 창백해졌다. 달이가 손을 내밀었다. 명현은 손을 잡았다. 바닷물이 목까지 차올라 왔다. 달이는 그대로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명현도 달이의 손을 붙잡은 채로 끌려들어 갔다. 숨이 막혀오고, 머리 속까지 하얘졌다. 그러자 바닷물이 황금 빛으로 서서히 바뀌더니,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달이가 바다의 밑바닥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사람 몸 하나가 겨우 들어갈만한 크기의 구멍이 난 조그만 동굴이었다. 달이와 명현은 그곳을 통과했다. 맞은 편은 역시 황금 빛 물로 가득 했고, 특별히 호흡의 곤란을 느끼지 못한 채 명현과 달이는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달빛이 쏟아졌다.
9
다희는 눈가를 간지럽히는 따스한 기운에 눈을 떴다. 붉은 햇살이 눈가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눈이 부셔 눈을 반쯤 감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주위는 온통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명현은? 달이는? 다희는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살펴보다가 자기가 명현의 외투를 덮고 있음을 발견했다. 얘는 어디 간 거야? 다희는 간 밤에 꾼 황당무개한 꿈을 떠올렸다. 풋, 달나라 토끼라니 웃기지도 않아 나도 참. 햇살이 다희의 몸 구석구석을 보드랍게 어루만졌다. 귤빛 바다에서는 잔잔한 파도가 일었다. 멀리서 뱃고동 소리와 끼륵끼륵 갈매기의 소리가 서서히 안개가 걷히듯 들려왔다. 다희는 눈에 달라 붙은 눈곱을 떼며, 수평선 너머로 느릿느릿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한 해가 찾아오고 그것을 보기 위해 바다로, 산으로 찾아 든 사람들의 부산함과 조급함에 상관 없이 해는 떠올랐다. 어제와 같이 혹은 어제와 달리 아무 말 없이 천천히 해는 떠오르는 것이었다. 다희는 그 앞에서 탄성을 지를 수 없었다. 뱃고동 소리도, 갈매기의 울음 소리, 파도 소리도, 다희의 숨소리도 그리고 시계 속의 흘러가는 시간의 소리도 잦아들고 해는 붉게 떠올랐다.
해가 다희의 시선과 일직선상에 놓였을 때 다희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몸에 묻은 모래를 떨어냈다. 그러자 웬 종이 한 장이 나뭇잎처럼 살랑이며 자갈밭 위에 떨어졌다. 다희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나에게 이곳은 세상의 끝. 난 바다로 간다. 너는 돌아서서 세상으로 가. 달 나라로 돌아가는 통로를 찾았어. 언젠가 그곳에서 보자.’
다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훑어 보았다. 아직 눈을 감지 않은 달이 있었다.
2002. 5. 2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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