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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수평선의 신비'



내 생일선물을 잘못 사오거나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 




오늘도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3번 테이블에 앉아 거리로 난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의 근심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위에 쓴 단 세 가지. 그는 항상 테이블 위에 모자를 내려놓는다. 그 모자가 놓이는 곳은 늘 3번 테이블 위다. 그는 언제나 유리벽 너머만을 바라보다가 주문한 음료가 바닥을 보이면 카페를 떠난다. 음료는 커피를 제외한 모든 음료로, 랜덤이다. 나는 3개월 전 그를 처음 보았지만 먼저 이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일하던 선임은 그보다 3개월 전에 그를 처음 보았다고 했고, 그의 선임은 또 그보다 3개월 이르게 그를 목격했다. 그의 모자는 검은색의 무늬가 없는 중절모로 늘 같은 제품이었다. 모자를 쓰고 있을 때의 그는 30대 중반의 직장인처럼 보이지만, 모자를 벗은 뒤의 그는 20대 초중반의 학생처럼 보였다. 마치 그는 30대로서 이 카페에 들어와서는 20대로 살다가 다시 30대가 되어 가게를 나서는 것 같았다. 이 카페 어딘가에 그의 20대가 박제되어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끔 나는 설거지를 멈추고 그가 바라보고 있는 유리벽 저편으로 넘어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그의 얼굴이 특별히 잘 생겼거나, 매력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어느날 문득 배드민턴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버리자 며칠 전 배드민턴을 칠 때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를 떠올리고 말았다. 


나는 바람이 부는 날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배드민턴을 치기 위해서는 바람이 불지 않아야 했다. 또 반대편에서 공을 받아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했다. 요즘의 나는 그 반대편에 설 사람을 구인하기 위해서만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제는 신참 아르바이트생에게 무심코 배드민턴을 함께 치지 않겠냐고 물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이 넘치도록 많은데, 어째서 배드민턴 권유 정도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할까 억울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바쁘고, 저마다의 이유로 내 반대편에 설 수 없었다. 신참은 여자친구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 반대편에 설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나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사람과만 배드민턴을 겨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까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확실하게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규정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안심해도 할 수 없다. 


나의 남자친구. 내 생일선물을 항상 잘못 사오는 남자는 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배드민턴이 그렇게 치고 싶다면 자신과 치면 되지 않느냐고 몇 개월 째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와는 배드민턴을 칠 수 없다. 그가 내 음력 생일을 항상 잘못 알고, 하루 전이나 하루 뒤에 선물을 내밀어 왔기 때문은 아니다. - 작년에는 일주일을 벗어나기도 했지만 - 그 정도의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란 그렇게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더군다나 그는 고등학생 시절에 수학 점수가 10점을 넘어본 적이 없다고 하니, 자꾸 내 쪽에서 트라우마를 건드릴 일도 아니라고 여긴다. 한 번은 곰곰이 고민해본 적도 있었다. 어째서 그는 안 되는 것일까. 용기를 내서 단 한 번쯤이라도 그와 배드민턴을 쳐 볼까. 재작년 즈음에는 굳게 결심을 하고 그에게 모 장소로 나오라고 한 뒤 배드민턴 채를 들고 나선 적도 있었다. 그날 갑작스레 - 내가 일기예보에 관심이 없었던 것뿐이지만 - 태풍이 일지 않았다면 우리는 움츠린 하늘을 바라보며 깃털 공을 주고 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와는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맞지 않았다. 분명 같은 모양인데 라고 생각하고 장난감의 부속을 맞춰보았는데 도저히 들어맞지가 않는 그런 경우였다. 하느님의 조카가 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고백하자면 요즈음 나는 저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와 배드민턴을 쳐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나를 전혀 몰랐고, 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그는 누구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관음증 환자일 것이라고 수근거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유리벽 너머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단지 유리벽을 보고 있었다. 어젯밤 나는 다짐했다. 내일 그가 나타난다면 반드시 저와 배드민턴을 치지 않으실래요? 라고 말을 걸어보겠다고. 마음 속으로 수 백번 대사를 되뇌었다. 그는 나타났고, 나는 지금 그가 주문한 레모네이드를 서빙접시에 받쳐 들고 바로 그의 등뒤에 서 있다. 


“저와 배드민턴을 치지 않으실래요?”





2014. 9. 1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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