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밤이 지나고 네 번째 낮을 맞이했다. 아침 공기가 상쾌했고, 예전보다 온기가 서너 겹 더해졌다. 집 밖에서 갖가지 새들의 소리며, 곱단처럼 일찍 잠에서 깬 산짐승들의 발자욱 소리가 부지런히 들려왔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곱단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그이의 앞 머리를 쓸어 정돈해주고 모포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햇살이 서양식 커튼처럼 나무들 사이에 드리워져 있었다. 허밍으로 출처 없는 가락을 흥얼거리며 몇 걸음을 걸었다. 곱단은 이북에 살 적의 일을 문득 떠올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풍금을 사달라고 조르던 일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르면 아버지는 마지못해 사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곱단은 더욱 더 악착같이 억지를 부렸었다. 이제는 아버지가 항복을 선언하고 말겠지..
나는 : 다시 한 번 여쭤보게 되지만… 정말 무섭지 않으셨어요?곱단 : 뭐가요?나 : 아무리 당시 정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말씀하셨어도… 역시 그 분께서 갑자기 돌변해 살인귀가 된다든가, 아니면 정말 소문처럼 도깨비로 둔갑할 수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곱단 : 무슨… 그런 건 외려 뒤에 덧씌워진 겁니다. 외려 그때엔 특별히 그런 건 없었죠. 그냥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러 미래의 모습 중 하나였을 뿐이었어요. 물론, 전쟁이… 사람들의 마음을 갉아 먹었지만… 나 어릴 적만 해도 한 동네에 사회주의 공부한다는 어른들이 여럿 계셨었죠. 전쟁 탓에… 북괴군이니 중공군이니 그런 공산주의를 믿는다는 자들이 일으킨 어리석은 죄 탓에 평범했던 것들을 더 이상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지요. 이 나이가 ..
다섯 번의 낮과 다섯 번의 밤이 지나가는 동안 곱단과 그이가 오두막에서 보낸 시간은 닷새였다. 오두막 속에 있는 것은 그이가 아끼던 세 권의 책과 한 사람 분의 모포, 성냥 한 갑, 소련제 반합, 이 주일 분의 쌀, 고구마 대 여섯 개가 전부였다. 곱단은 특히 세 권의 책과 소련제 반합에 눈이 갔다. 책은 세 권 중 한 권은 소련어로, 한 권은 일본어로, 한 권은 언문으로 쓰여 있었다. 그이는 각각 레닌의 , 나쓰메 소세키의 , 황순원의 라고 소개했다. 그이의 말에 따르면 은 우리가 지향해야할 시대 이념을, 은 마음의 깊이를, 는 민족애를 대변해주는 책이라고 했다. 소련제 반합에 대해서는 간도에서 적군에 가담했던 시절부터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이의 아버지는 소련 적군의 힘을 빌어 무장 강화를 꾀하고자 ..
나 : 할머님, 혹시 무섭거나 하진 않으셨어요? 곱단 : 무섭기는... 나 : 그래도 당시로 치면 빨갱이라고 하면 피난민들한테 공포였을 텐데요. 뭐 흔한 예로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했다가 살해 당한 애 얘기 같은 건 저도 어릴 때 구구단 외우듯이 듣고 자랐거든요. 곱단 : 선생님이 전쟁을 몰라서 그래요. 나 : 아, 저 할머님. 선생님은 안 쓰시기로 하셨잖아요. 곱단 : 아 참, 미안해요. 나 : 아, 아닙니다. 곱단 : 전쟁 통에는 빨갱이고 연합군이고 없어요. 적어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나를 죽이려는 사람과 죽일 생각은 없는 사람, 그렇게만 나눠져요. 빨갱이라고 해서 있는 대로 사람을 다 죽이고 다닌 건 아니었죠. 마찬가지로 연합군이라고 사람을 다 살려준 건 아니었어.... 나 : 그랬군요....
고모부와 고모는 그이가 풀려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자꾸만 그이의 일을 묻는 곱단에게 고모부는 그 사람 일은 입에도 담지 말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잘못하다가는 일가족 모두가 끌려가 동반 사형을 당하는 일도 있던 때였다. 곱단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말을 그때 처음 몸으로 실감했다. 아무 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멀리서라도 그이가 언제 죽었고, 어디에 묻혔다는 얘기만이라도 듣게 되길 바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이가 잡혀간 날 밤 곱단은 까닭없는 고열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잠결에 고모부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이가 군에 수송되어 가던 중 지프에서 뛰어내려 산으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산에 불을 놓을 것 같다고, 여기서는 겨울을 나기 힘들 것 같으니 곱단과 사위..
곱단 : 선생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요? 나 : 네? 곱단 : 가슴이 너무 아파서 더는 못하겠어요. 나 : 가슴이 어떻게 아프신데요? 곱단 : 얘길 한다고 선생님이 어떻게 제 가슴 속을 알겠나요... 내일 다시 봅시다. 부탁드립니다. 나 : 아뇨, 할머님... 그렇게 머리를 숙이시지 마시고요. 그렇게 하셔도 이건 안 되는 겁니다... 곱단 :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나 : 어유... 할머님, 알겠습니다. 근데 내일부터는 그 선생님 호칭도 좀 바꿔주세요. 제가 할머님보다 훨씬 덜 살았는데요. 특별기획으로 지면을 대거 할애하여 싣는 인터뷰도 아니고, 고작 한 페이지 정도가 할당되어 있을 뿐인, 잡지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인터뷰였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부장에게 항의 전화를 넣었을 테지만 ..
오늘 저녁에 저희 집에 밥 먹으러 오세요. 그이와 말숙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곱단을 돌아봤다. 방금 말 소리가 곱단에게서 난 것이 분명하느냐는 표정이었다. 그이의 손에는 그이가 ‘수레바퀴 아래서’라고 부른 책이 들려 있었다. 그이는 말숙이에게 독일 소설가가 썼다는 그 책의 내용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말숙은 글을 좀 읽을 줄 안다고 소설에 대해서도 아는 체를 하고 있었다. 곱단은 한 쪽으로 물러나 서가에 낀 먼지를 쓸어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숙은 그이가 마음에 든 눈치였다. 곱단은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곧바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쓸어담을 수 없었다. 밥 먹으러 오시라고요, 싫으세요? 그이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이내 정리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저녁 밥상 김곱단 할머니는 다시 말을 멈춘다. 나는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어느새 석양 무렵이다. 할머니는 말을 지나치게 천천히 했던 것이다. 61년 전으로 타임슬립이라도 한 것 같은 할머니의 정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일어서며 기재를 켠다. 할머니는 미동도 없다. 눈을 껌벅이는 것을 보니 큰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인터뷰를 하다가 인터뷰이가 사망하는 일은 드물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 경우 초래될 여러가지 번거로운 일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할머니 물 좀 마시겠습니다. 라고 크게 외치고는 냉장고 문을 연다. 물병을 꺼내다가 우연히 찻잎이 든 유리병에 눈길이 멈춘다. 저 병일까. 설마. 물을 마시고 사랑방으로 돌아와 보니 할머니는 정원으로 걸어나가 코스모스와 소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