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자르는 사람 대체 왜 자꾸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거야! 그는 비명을 질렀다. 자고 일어나니 또 머리카락이 자라 있었다. 그의 꿈은 대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는 머리카락이 자라는 게 싫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었다. 그런데도 쉼없이 머리카락은 자랐다. 부처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어, 삶은 고통의 연속이야. 그는 절망하고 절망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으나 20년 동안 기도를 해도 머리카락의 성장이 멈추지 않자 불교로 개종했다) 그가 언제부터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혐오하기 시작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도 잘 몰랐다. 단지 추측하고 있을 뿐. 아마, 어릴 적에 부모가 이혼했을 때부터였거나, 아니면 가장 좋아하던 장난감을 사촌동생에게 강탈당했을 때, 그것도 아니면 7년간 짝사랑하던 이..
어느 재즈 까페 두 페이지로 구성된 메뉴판을 받았다. ‘잇츠 온리 어 페이퍼 문’이 엘라 피츠제럴드의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글씨로 쓴 메뉴에는 커피 원두 산지의 이름들이 죽 나열되어 있다. 탄자니아, 브라질, 킬리만자로, 코나, 에디오피아, 케냐, 에콰도르, 페루. 어느 곳 하나 가본 적 없는 이국의 이름들이다. 신맛, 쓴맛, 바디감 등의 용어들이 쓰여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분명히 자각되지 않는다. 좋은 걸로 주세요. 그런데 몇 시까지 하죠? 열 두시까지라는 답을 듣는다. 휴대폰 화면을 켜본다. 아홉 시 삼 십 칠 분이다. 이곳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어 거리에 한참 내리고 있을 눈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우 하이 더 문’으로 곡이 바뀌었다. 테이블 앞의 무대에는 무명의..
윌리엄 터너 - Mortlake Terrace 딜리트 (Bye bye Memorial code-etc1) 한 달 전부터 계속 가슴이 아프다. 살아가다 보면 몸 어딘가가 갑자기 아플 때가 있다. 그것은 건강을 좀 신경 써달라는 몸의 SOS다. 구조요청을 받은 사람들은 병원으로 달려가곤 하는데, 병원에서 간혹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 '글쎄요. 몸에 아무런 이상은 없는데...' 건강검진표를 보니 나는 정말 양호한 인간이었다. 나는 병원을 나와 코리아시티의 거리를 걸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플라타너스 입사귀 몇이 죽어서 거리를 나뒹굴었다. 잎 하나가 발에 밟혀 바스러졌다. 파삭. 하는 비명소리. 가슴이 또 아파왔다. 그러나 내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거리를 계속 떠돌았다. 코리아시티를 지나 챠..
전화가 안 온 날 이 시간이면 그는 항상 전화를 했다. 허나 오늘은 아직이다. 창밖에서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미안하지만 들어올 수는 없다. 가뜩이나 습기가 가득찬 마음에 더 수분을 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를 만나던 때에도 비가 왔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내 마음도 날씨 같았다. 불을 모두 꺼둔 방은 별빛을 잃은 우주처럼 서늘하다. 똑딱똑딱. 시간을 미는 초침 소리만이 또렷하다. 저 놈의 초침 소리가 시간을 밀고 있는 탓에 내 마음은 더욱 초조하다.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제치고 일어났다. 보이지 않지만 익숙하게 벽시계를 떼어내어 전지를 뽑았다. 그리고 시간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더 이상 누구도 시간을 밀어내지 못했다. 초침 소리가 멈추자 수돗물 소리 같던 빗소리가 갑자기 폭포 소리..
오후만 있던 일요일 내내 비가 온다. 길 위로 엎질러진 네온이 흐른다. 꼭, 밟으면 신발 둘레에 알록달록하니 묻어날 것만 같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거리의 요란한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소리가 볼륨을 줄인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다 꽂는다. 이어폰 줄에 매달려 있는 리모컨을 이용해 음악을 켠다. 들국화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전인권 씨의 슬픔이 끓는 듯한 목소리가 차분한 투로 들려온다. 노래 마디마디에 빗줄기 소리가 새어들어왔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내렸네… 생각없이 걷던 길 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일요일은 늘 오후만 있는 것 같애. 재현이 말했다. 음, 그런가? 재현이 피식 웃었다. 학교 도서실은 여전히 허술하게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익숙하게 문예부 쪽으로..
보노보노를 만났어 나, 보노보노를 만났어. 캐롤 송 ‘라스트 크리스마스’가 흘러나올 무렵이다.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원체 엉뚱한 이야기를 잘 꺼내던 그녀라 대수롭지 않게 흘려 듣는다. 그 비버 말이지? 내가 되묻는다. 비버가 아니라, 해달이잖아. 그녀의 왼쪽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기울어진다. 그랬었나? 그랬었나가 아니잖아, 그런 거야, 애초부터 작가가 그렇게 설정한 거잖아. 그녀에게 그런 기묘한 이유로 일일이 화를 내지 말아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아무튼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닌가. 그래, 만나서 뭘 했는데.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묻는다. 지금, 뭘 했느냐가 중요해? 그녀는 오늘 밤 나와 대화할 의사가 없는지도 모른다. 뭘 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보노보노를 만났..
나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한다. 그에 비해 이야기를 마친 김곱단 할머니의 표정보다 오히려 차분하다. 인터뷰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했다. 태양이 아직 중천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가을 하늘은 하루하루 아스라하게 높아져서 태양은 며칠 전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김곱단 할머니는 몸을 일으키더니 부엌에서 감과 포도를 내어 온다. 단단하게 익은 감의 껍질을 깎아내며 담담히 입을 뗀다. 곱단 : 선생님, 놀라셨겠지요. 이 늙은이가 살아온 인생은 그 다음부터는 절망이 반이요, 목숨 부지가 반이었습니다. 내가 이 과도 하나를 손에 쥐게 되는 것만도 40년이 넘게 걸렸지요. 환갑이 되어서야 겨우 용기를 내서 칼을 손에 쥘 수 있었답니다. 매일 매일 밤마다 달콤한 꿈과 함께 그 마지막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
누군가를 용서해본 적이 있나요 곱단은 서둘러 그이를 깨웠다. 그이가 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 이미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직감했다. 곱단은 그이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가는 거예요. 죽더라도 우리 같이 죽는 거예요. 아시겠죠?! 곱단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이는 망설였다. 아니, 그보다는 자기 앞에 닥쳐온 갑작스런 죽음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곱단이 어제까지 알던 그이가 아니었다. 곱단은 흔들리는 그이의 눈빛을 바로잡으려는 듯이 그이의 손을 꼭 맞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밖에서 쿵! 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오두막집이 우르르 흔들렸다. 그이의 손은 더욱 더 떨렸다. 곱단은 그이를 품에 안고 어린애를 어르듯이 등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