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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깔끔하게 무시당하는 일쯤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니다. 허나 기대가 컸던 만큼 허탈감도 컸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라면 반드시 응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나는 또 다시 동네 꼬마들을 유혹하러 다니는 수밖에 없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 옆에 레모네이드를 내려놓고 조리대로 돌아올 때까지도 사실 기대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다. 조리대로 설거지 해야할 접시들의 산을 보는 순간, 비로소 현실감이 돌아온다. 마치 3년 이상 만나던 남자에게 실연 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유리벽을 바라보며 레모네이드를 금세 다 마셔버리더니 곧 카페를 떠난다. 그가 앉았던 테이블을 행주로 닦으며 조금 눈물을  모집한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는가. 배드민턴따위 치지 않고 살아도 인생은 조금도 위태롭지 않을 텐데. 


아르바이트복을 옷걸이에 던져놓고 카페 문을 나서자 청량한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바람은 쓰다듬는 손길처럼 잔잔하다. 완벽한 배드민턴의 날씨다. 라고 생각한 순간 나는 길 건너편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를 발견한다. 아니다. 지금은 모자를 쓴 남자다. 그는 내게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인도이지만 차도처럼 쓰이고 있는 길에는 마침 차가 지나지 않는다. 어쩐지 요단강을 건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로 건너간다. 길을 건너온 내게 모자를 쓴 남자가 말한다. 


“배드민턴을 치기 정말 좋은 날씨네요. 그럼, 어디에서 하시겠습니까?”


반사적으로 함박웃음을 짓고 만다. 그의 손을 덥썩 잡아버릴 뻔 한다. 우선은 배드민턴채를 집에서 가져와야 했으므로 모자를 쓴 남자와 나는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집으로 향한다. 카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언덕베기에 있는 3층 빌라 건물의 2층 203호실이 내 방이다. 방에 도착하기까지 그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쁘다. 상대가 배드민턴채를 붙잡고 필드에서 내 맞은 편에 설 때까지 침묵을 지켜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빌라의 입구에서 기다리게 한 뒤 배드민턴채와 깃털 공을 챙겨서 내려올 때까지, 함께 버스를 타고 여의나루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나서 함께 푸른 잔디밭에 마주할 때까지도 그는 끝끝내 침묵을 지켜준다. 이런 말을 하면 생일 선물을 잘못 사오는 남자에게 실례가 될 것 같지만,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완벽한 나의 이상형이다. 


그와의 배드민턴 경기는 완벽했다. 완벽한 배드민턴의 날씨에 이상형의 남자와 배드민턴 경기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기도 했다. 배드민턴 경기가 끝나고 우리는 나란히 잔디밭에 앉아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겨우 가라앉히고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제 인생에 이 이상의 배드민턴은 없을 것 같아요.”

“별 말씀을요. 오히려 제 쪽에서 더 감사를 드려야겠지요. 당신은 저와의 배드민턴을 위해 저편에 있는 당신의 인생을 포기한 셈이니까요.”

“네?”


나는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의 말을 분명히 알아들었지만, 어쩐지 모른 척 해야할 이야기라고 생각해 반문한 것이었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자신의 왼편에 중절모를 내려놓으며 검은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넘겼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흰색이 되기 거의 직전의 회색 같은 미소였다. 


“저는 당신과 다른 평행세계에 사는 사람입니다. 제가 사는 이 세계에선 평행세계 사이를 왕복할 수 있는 장치가 개발되었죠. 그걸 이용해서 당신이 살던 저쪽으로 건너가 당신을 이쪽으로 데려온 겁니다. 이 세계에서 태어난 저는 자유롭게 다른 세계 사이를 왕래할 수 있지만, 장치가 개발되지 않은 세계에 살던 당신은 평생에 단 한 번밖에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공교롭게도 그 한 번을 방금 전 저와 배드민턴을 하며 사용하셨습니다. 즉, 더이상 이 세계는 당신이 살던 저 세계가 아니고 당신은 이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2014. 9.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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