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선 자리에서 곱단은 건너편 청년이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제 본 노을빛만 떠올랐다. 곱단은 그이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한 번만이라도 말을 붙여봤으면 좋겠다. 고모는 시어머니가 될 청년의 어머니에게 그럼, 조만간 조촐하게 식을 올리자며 인사를 하고 제안했다. 곱단은 그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쟁 통에 천애 고아가 되어버린 자기를 거둬준 분들이었다. 더 이상 짐이 될 수도 없었고, 일찍 혼인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다들 그렇게 혼인을 하던 때였다. 밤새 곱단은 자기 옆에 그이를 놓아보고는, 저는 그이의 연인이 될만큼 신여성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이의 목소리는 한 번쯤 들어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남자와 결혼하여 여느 아낙네처럼..
곱디 고운 봄 곱단네 가족은 연합군이 피우다 말고 버린 꽁초들을 모아 되파는 일을 했다. 이 업종은 유난히 경쟁이 치열했다. 곱단네처럼 일가족이 뛰어드는 경우도 많았다. 아직도 교전이 이어지고 있어서 위험한 경기도까지 올라갔다 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물론 대대적으로 꽁초 사업을 벌이는 경우로 운송 차량까지 두고 있는 것이다. 학교는 산자락에 칠판 하나 걸어두고 열리고 있었지만 곱단 같은 다 자란 여자아이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곱단은 아직도 글을 쓰고 읽을 줄을 몰랐다. 곱단의 부모는 전쟁이 나기 전 이북에 있을 때는 제법 벌이가 되는 식료품점을 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료품점은 군의 관리하에 들어갔고, 곱단의 아버지는 만주에서 벌인 항일독립전투 가담 경력 때문에 상사..
나 : 먼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노파 : 김곱단입니다. 나 : 네, 김곱단 할머님이시군요. 올해 연세는 어떻게 되십니까. 곱단 : 엊그제가 팔순이었어요. 나 : 아, 80세가 넘으셨는데도 이렇게 정정하시군요. 듣기로는 직접 저희 잡지사로 인터뷰 요청을 해오셨다는데, 특별한 연유가 있으십니까? 곱단 : 부끄럽지만... 제가 초등학교를 올해서야 졸업했어요. 한글도 이제 막 읽을 수 있게 되고 보니 꼭 새로 사는 것만 같고... 별 의미 없는 생이었지만, 그래도 80 먹은 노인네가 가슴에 품은 얘기 한 자락 누가 들어주면 좋겠다 싶어서 늦게 배운 글씨로 편지 한 통 보내봤지요. 나 : 네에. 그러셨군요. 편지를 보니깐 어떤 분을 찾고 계시다고 쓰셨는데 어떤 분인가요. 곱단 : 61년 전에 한 남자애를 ..
분홍저고리. 박창돈 61년 인터뷰 61년 전에 한 남자애를 만났고 마음에 품었지요.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3년 간 동거를 하던 연인과 이별하고 다니던 잡지사에 장기 휴가서를 내고 2주 째 집에 틀어박혀 있던 때였다. 부장은 최후 통첩을 했다. 이번 인터뷰를 따오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것이었다. 퇴직 당한다고 해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매일 매일 무작정 버스를 타고 처음 보는 동네에 내려 배회하다가 동네 약국에 들러 수면제를 사오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수면제는 제법 치사량에 가깝게 모여 있던 참이었다. 부장은 내 의사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메일로 인터뷰이의 신상 명세서를 보내왔다.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가득한 노파의 사진을 보자마자 다음 내용은 읽지도 않고 컴퓨터를 꺼버렸었다. 자..
結 본 심리 실험은 8월 1일부터 8월 21일까지 약 3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피험자에게 암시를 걸 때 사용한 약품은 귀사의 MC001 프로트타입이다. 피험자의 사체에 대한 부검은 경찰고 협조하여 별도로 진행하지 않기로 했으며, 피험자의 보호자에게는 위자료가 제공되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귀사의 약품이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전시 작전 목적으로 활용할 시 장병들의 사기 진작 및 전장 공포 해소, 외상후 스트레스 발생 억제 등 막대한 전력 상승 효과가 기대된다. 보다 상세한 리포트를 요구한 귀사의 방침에 따라 본 리포트는 소설 형식으로 작성되었으나, 기재된 내용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보증한다. 실험은 대부분 당초 계획한 바대로 원활하게 진행되었으며, 결과 또한..
소년은 꿈에서 의사의 딸을 보았다.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거리에 딸은 서 있었다. 소년은 딸에게 다가갔다. 딸은 멀어졌다. 소년은 다시 다가갔다. 딸은 다시 멀어졌다. 같은 극의 자석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거리를 유지한 채 멈추어 섰다. 검은 허공이 조금씩 조금씩 두 사람을 어디론가 운반해 가고 있었다. 소년은 자기 자신이 원래의 자리에서 지나치게 멀리 와버렸음을 느꼈다. 허나 돌아가야 할 곳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어둠, 어둠, 어둠만이 가득했다. 의사의 딸도 어둠에 묻혀버렸다. 소년은 딸의 생김새를 잊어버렸다.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였던가도 잊었다. 소년에게는 두근거렸던 심장만이, 사랑의 육체만이 남았다. 이내 그것마저도 지워졌다. 소년이 지워졌다...
사람을 이기는 것은 힘들었지만 죽이는 것은 쉬웠다. 사람을 이긴다는 것은 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두 가지 항을 충족시켜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죽이는 것은 오직 지지 않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박 군을 죽이는 일은 너무 간단해서 실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늦은 밤 박 군은 동네 편의점에서 디스 한 갑을 사서 나왔고, 곧 흡연을 위해 인적이 드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는 순간 소년은 그의 뒷목에 과도를 내리 꽂았다. 박 군은 피를 쏟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소년은 그 자리를 벗어나 멀찍이 떨어진 건물의 옥상에서 박 군의 숨이 멎어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거리가 피로 물드는 장면은 붉은 장미꽃이 피어나는 장면과 닮았다. 다행히 휴대폰 전..
本 소년은 나의 진료실에서 눈을 뜨자마자 간호를 하던 딸과 눈이 마주쳤다. 딸은 소년보다 한 살이 어렸고 아름다웠다. 딸은 소년이 생각하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단발 머리모양과 하얀 피부, 붉은 입술, 드러날 듯 말듯 여리게 솟은 가슴. 가는 팔과 다리. 무심한 듯 자상한 성격. 소년은 딸에게 첫 눈에 반했다. 첫 눈에 딸이 자신의 여자임을 알았다. 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딸은 소년에게 물었다. 그 깡패들한테 왜 쫓기고 있었어요? 소년은 침묵했다. 쫓기고 있던 건 맞아요? 답하지 않았다. 저한테 반했어요? 소년은 답할 수 없었다. 딸은 답을 들었다. 딸이 말했다. 이렇게 맞고 다니지 마요. 슬프잖아요. 소년은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