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위들 “이걸 뭐라고 읽어야 하죠?”“룬스. 거위들이라는 뜻이네요..” 중고 음반을 파는 가게의 점원은 자신 있게 말했다. 나는 4천 원에 낯선 외국 음반을 한 장 구입해 가게를 나왔다. 9월의 가운데였다. 바람은 아직 상냥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선배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재수를 하겠다고 수도 서울에 상경한 것은 작년 겨울 수능 결과가 발표된 이후였다. 재수를 선택하지 않아도 수도권의 중하위권 대학에는 입학할 수 있는 결과가 나왔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선배와 같은 대학교의 캠퍼스를 거닐 수 없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재수를 할 거에요.”“힘들텐데...”“보고 싶어요.”“나도.” 선배는 단지 대화의 흐름에 맞춰준 것 뿐이었는지도 몰랐다. ..
뭔가가 없어 분명히 뭔가가 없다. "뭔가가 뭔가?" 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재치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재치란 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 행복이어서 그걸로는 뭔가가 없다는 기분을 결코 지울 수 없다. 뭔가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돈이 없다. 시간이 없다. 직장이 없다. 일이 없다. 애인이 없다. 잠이 없다. 꽃잠도 없다. 부모가 없고, 친구가 없다. 차비가 없고, 교통편이 없다. 편두통은 있지만 약이 없다. 수 많은 없는 것들 속에서도 뭔가는 없다. 무심코 노래를 불러보았지만 역시 이 속에도 그 뭔가는 없다. 도무지 뭔가를 찾을 방법이 없다. 과연 이 세상에 뭔가를 찾을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곰곰 머리를 이리저리 기울여보지만 역시 답이 없다. 분명한 건 신은 없다. "신발마저 없는가?" 라고..
꽃미남풍의 강아지 꽃미남풍의 강아지였어.남동풍은 아니고?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던지는 말은 모조리 안타를 맞고 튕겨져 나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외야로 날아가버린 ‘꽃미남풍의 강아지’를 쓸쓸히 안고 돌아와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두 팔과 교차로 팔짱을 낀 채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다. 내 도전이 무모한 측면도 분명 있었다. 이런 와중에 대체 꽃미남풍의 강아지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분위기 파악 못하는 장난질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야... 잠깐만 열을 식힐 겸해서 좀 들어봐주면 안 될까, 꽃미남풍의 강아지에 대해서 말이야.뭐?! 그녀는 진심으로 황당해했다. 눈동자 속에는 얼핏 후회의 빛도 어렸다. 대체 뭐 이따위 남자를 사랑한다고 만나..
이제는 아예 잔디밭 위에 드러누워 귤빛으로 물든 구름을 바라보는 남자친구를 내려다본다. 결국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더이상의 로맨스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생일 선물을 매번 잘못 사오는 남편과 살게 된다. 그는 결혼기념일을 잘못 기억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완전히 잊어버리고는 되려 그런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자신과 결혼했냐고 호통을 쳐서 나를 울린다. 그날 나는 온 마음이 흠뻑 젖도록 종일 울 것이고, 그로써 그에 대한 마지막 제례가 끝날 것이다. 아무런 기대감이 없는 날들이 시작될 것이고, 빨래를 널다가 허리께를 두드리며 몸 안에서 들려오는 텅빈 소리를 듣게 된다. 설거지나 마른 빨래를 정리하는 일따위로 생색을 내는 남자를 목도하게 될 것이고, 아이가 생긴 뒤에는 일을 계속해야 ..
나는 혼란에 휩싸여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무표정이 되고 말았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예상 범위 내의 일이라는 얼굴로 유유히 거실 쪽으로 걸어가 소파에 걸터 앉았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소파 앞 티테이블에 모자를 내려놓고 리모컨을 들어 음악을 켰다. 몇 시간 전까지 내가 듣고 있던 드뷔시의 ‘이미지’가 다시 시작된다. 나는 그때까지도 얼이 빠진 상태로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서있었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마치가 이곳이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행동했다. - 사실, 그의 집이었지만. - 거의 물이라도 한 잔 달라고도 말을 꺼낼 기세였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행동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네요. 결국은 계획이 실패하고..
그날의 일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중절모를 혐오하는 여자 중의 한 명으로 살아가고 있다. 생일선물을 잘못 사오는 남자, 그러니까 지금의 남편 역시 처음에는 혐오의 대상 중 하나였다. 그는 중절모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좋지만 딱 두 가지 결점이 있어, 하나는 나이가 상당히 연상, 두 번째는 건망증이라는 소개를 지인에게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그가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생일선물을 잘못 사오는 남자이며, 중절모까지 쓰고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모 관광호텔 카페의 소개팅 - 이라고 쓰고 맞선이라고 읽는 게 정확 -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멀리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곧바로 발길을 돌려 호텔을 나가려고 했었다. 주선자가 레슬링 기술까지..
다음날 카페에 출근했을 때도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3번 테이블에 앉아 전면 책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근심을 알지 못했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위에 쓴 단 세 가지. 그는 항상 테이블 위에 모자를 내려놓곤 했다. 그 모자가 놓이는 곳은 늘 3번 테이블 위였고, 그는 언제나 전면 책장만을 바라보다가 주문한 음료가 바닥을 보이면 카페를 떠났다. 음료는 오직 볼리비아 커피만을 주문했다. 그를 위해서 특별히 볼리비아 원두를 상시 구비해두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책장을 바라볼 뿐 단 한 번도 책장에서 책을 꺼내 펼쳐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 아르바이트생 사이에는 거대한 전면 책장을 가지고 싶어하는 가난한 작가 정도가 그의 정체가 아닐까 하는 가정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나는 어..
나는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살며시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했다. 이건 진짜다. 그런 결론에 이르렀을 때 가장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이 된 순간의 감각이 느껴졌다. 가령 아끼는 사기컵을 떨어뜨렸는데 무심코 발등으로 받아낸 것 같은 그런 느낌.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는 내 눈 앞에 이런 형태로 놓여 있었다. “음… 글쎄요. 당신의 말을 제가 95% 정도 신뢰한다고 쳐도… 미심쩍은 건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세계는 제가 이전에 살던 세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것 같은데요?” “당신이 이쪽으로 건너올 때 당신의 모든 기억들도 리뉴얼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죠. 그건 아주 미세한 작용입니다. 성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