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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쓰리포인트 슛

멀고느린구름 2014. 6. 1. 09:14


쓰리포인트 슛 (Three Point Shoot)





1.시합은 무슨 시합이냐, 인생 자체가 시합인데 또 시합을 해?



  무더운 여름이었다. 길가다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더위사냥을 사먹는 것만으로 무한한 희열을 느낄 것만 같은 여름.

  따르릉. 전화가 왔다. 최대리는 부스스 눈을 떴다. 방안에 엷은 햇살이 퍼져 있었다. 일요일인지라 좀 더 푹 자고 싶었던 그는 조금 짜증을 느끼며 수화기를 들었다.

 

-야 나야 아직 자냐. 이런 굼벵이 같은 놈. 야, 나와라. 오늘 한 판 뜨자

 

최대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농구에 환장한 놈, 몇 시냐 지금이!

 

최대리는 수화기를 내던져 버렸다. 머리가 띵했다. 어제 회식자리에서 마신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속 편히 농구 따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일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번에 새로 하는 프로젝트 소개차로 장과장이란 사람도 오늘 만나봐야 했다. 최대리는 손을 뻗어 침대에 딸려 있는 서랍을 꺼내 알약 두 알을 입에 물고는 일어났다. 비칠비칠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물을 꺼내 마셨다. 목구멍에서 꿀꺽 소리가 들렸다.

 

'그래 맨 날 먹는 알약이 맛있더냐 이 놈아.’

 

습관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0시. 분명히 아침 일찍 이었다. 적어도 최대리의 일요일에는 말이다.

 

‘장과장 장과장이라…명함이 어딨더라…’

 

어제 집에 들어와 방바닥에 던져놓은 양복의 주머니를 여기 저기 뒤져보았다. 없었다.

 

‘젠장 분명히 어따 떨어뜨린 거군...휴우….’

 

재채기가 나오려다 만 듯한 허탈감이 밀려왔다. 머리도 어지럽고, 그리고 피곤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이 여름날의 아침에 이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었다.

 

‘어쩌지…’

 

별 수 없다. 중요한 일이니까 어떻게든 명함을 찾아볼 수밖에. 아니면 어디 연락이라도 해보면 뭐 알 수 있겠지. 오늘의 작전 목적은 어쨌든 장과장을 만나는 일인 것이다. 그래!

 

  삐리리리리~. 이번에는 휴대폰이다.

 

-야! 임마 그냥 끊으면 어떡해! 나 지금 빳때리 다 돼 가니까. 너 빨리 나와. 오늘 오후 2시에 거기 강변농구장으로 오면 돼. 알았지?

-장난 치냐. 내가 너같이 그렇게 한가한 놈인 줄 알어? 엉! 나 오늘 장과장도 만나야 되고 바쁘단 말이야. 임마!

 

아무 대꾸도 없었다. 끊어버린 모양이었다. 최대는 심한 어질증을 느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김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최대리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던 입사동기 녀석이었던 김은, 어느 날 자유를 위해서라며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었다. 알고 보니 짤린 것이었다. 한창 IMF니, 구조조정이니를 떠들어대던 때였으니, 실적 제로인 김이 희생양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김이 떠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한가로운 봄날. 최대리는 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같이 농구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 동네 공터에서 젊은 애들이 농구를 하는 걸 보고 가슴에서 후끈 달아오르는 게 있었다나 뭐라나. 그럭저럭 착하다는 평을 듣는 최대리로서는 실업으로 상심했을 지도 모를 '전 동료'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김과 최대리의 농구는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둘이 심심할 때 만나서 일대일이나 슛 많이 넣기 따위 시합이나 하려나 했다. 실제로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김은 소위 젊은애들과 시합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김과 최대리도 아직 30대 초반이니 그리 늙은 건 아니지만 젊은애들이 먼저 시합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결국 최대리와 김을 젊은애들은 주책없는 아저씨들로 여기지 시합 상대로는 여기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애들에게 우리 쪽에서 먼저 시합제안을 하자고? 최대리는 김의 그런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당연히 거절했었다.

 

-우리는 어엿한 중년이라고, 애들과 한가롭게 농구나 하고 있을 위치가 아니란 말이야! 시합은 무슨 시합이냐. 인생 자체가 시합인데 또 시합을 해?


  신호등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최대리는 수년간의 판매원 생활 덕에 단련된 뜀박질 실력으로 가볍게 길을 건넜다. 김은 결국 일을 저질러 버리고 만 것이다. 시합이라니. 그것도 애들이랑. 최대리는 앞이 깜깜해지는 듯 했다. 떨어지지 않는 숙취, 장과장의 연락처를 찾아 만나야 한다는 사명감, 피곤함, 짜증, 그리고 미칠 듯한 이 땡볕!

 

장과장의 연락처는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장과장쪽에서 먼저 최대리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 00의 장과장입니다. 에..저 그게 오늘 제가 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을 취소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해외에서 오시는 정말 중요한 손님이라…

-아 네 그럼 할 수 없지요. 뭐

 

게임오버. 장과장과는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비즈니스맨에게는 약속이란 목숨 줄과도 같은 것인데, 그걸 취소한다는 것은 결국 더 큰 걸 물었다는 뜻이니까. 꿩을 잡았으니 닭은 볼 일 없습니다를 완곡히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이렇게 되면 최대리에게는 딱히 남은 시간 동안 할 일도 없었다. 잠시 공백이 된 생각의 틈으로 아까 김의 전화가 슬금슬금 비집고 들어왔다. 이런 심리 상태에서는 딴 일을 한들, 그 쪽 일이 신경 쓰여 제대로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최대리는 김이 기다린다는 공터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터벅터벅.




2. 백수와 삶의 기본기는 즐기는 것!



  공터 쪽에 다다르니 김이 벌써 와 있었다. '나는 할 일 없는 아저씨요' 라고 호소하는 듯한 하늘색 운동복 차림의 김.

 

-허허 얌마 그럴 줄 알았다. 아직 1시도 안 됐는데 오네. 근데 너 옷은? 그 양복 입고 시합 할 거냐?

 

이것저것 짜증나는 일이 연속되어 최대리의 신경은 초민감한 상태였다. 최대리는 괜한 오기를 부렸다. 김을 흘겨보며.

 

-왜 안 되냐? 그럼 그냥 가고.

-아..아니 뭐. 네가 좋음 된 거지 허허. 너 오늘 좀 이상하구나

 

최대리는 오늘 충분히 이상할 만 했다. 아니 평소에 늘 이상하다 오늘 잠시 정상이 된 것일지도 모르고.

 

‘월급쟁이의 삶이란 게 원래 다 그런 거 아닌가. 내 삶인 것 같다가도 정신차려보면 내 삶이 아니고, 술을 마시다가도 어? 여기 있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건가? 아님 술이 나를 마시는 건가 하는 나름대로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최대리는 아직 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머리가 여전히 띵했다. 어제는 도대체 얼마만큼 마신 걸까. 최대리는 생각도 잘 나지 않는 제가 참 우습게 여겨졌다. 그래도 열심히 살겠다고 바둥대는 저가 아닌가. 그런데 가끔 최대리는 저가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삶 자체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느끼곤 했다. 그럼 대체 누구의 삶? 누구를 위한 성실?

 

공터의 농구코트는 제법 쓸만했다. 골대의 그물도 너덜 하긴 하지만 무사하고, 바닥에는 친절하게도 분필 같은 것으로 각 라인이 그려져 있었다. 그 위에서 김은 혼자 열심히 공을 튀기며 슛 연습을 했다. 슛을 하나 성공시킬 때마다 최대리에게 패스를 해서 '너도 해봐' 라고 권하곤 하는데, 그 기회가 얼마 오지 않았다. 아칫아칫 공을 보면서 하는 불안한 드리블, 손바닥으로 휙휙 던져대는 슛. 동작 하나하나가 어정쩡한 김이 뭘 믿고 시합을 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합… 이길 수 있을까? 최대리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왕 하는 시합 애들에게 질 수는 없지 않은가! 최대리는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이어도 알고 보면 고등학교 때는 반에서 농구 꽤 하는 축에 들었던 사람이었다. 일명 ‘모래 코트의 유성’.

 

-야 배고프지? 시작하기 전에 밥이라도 먹자. 어디 갈래?

 

  김은 농구연습에 꽤 몰입을 했던 모양이었다. 최대리가 온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밥을 먹으러 가자는 걸 보면. 최대리는 아까부터 배가 고팠다. 사실 배가 고프면 철학적이고 진지한 생각이 나는 타입의 그인 것이다.

 

  근처 짜장면 집으로 갔다. 봉황성. 참으로 거창한 이름이었다. 정작 건물은 코딱지만한 크기에 가게 안의 벽에는 한 20년은 된 듯한 판박이 스티커들이 꼬질꼬질 붙어 있는 그런 곳이었다. 최대리와 김이 앉은 쪽 벽에는 달려라 하니, 아리아리 동동, 아기공룡 둘리 등등이 철모르고 붙어 있었다. 봉황은 이런 서민적인 곳에서 사는 것일까. 차라리 과장하지 말고 똘이네 짜장, 철수반점 이런 걸로 했다면 좀 봐줄만 했을 것을. 최대리는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짜장면 맛의 반도 채 느끼지 못했다. 그에 비해 김은 ‘짜장꼽배기스페샬’ 을 시켜  그릇에 얼굴을 정조준 한 채 부리나케 먹고 있는 중이었다. 짜장곱배기에 만두, 탕수육, 짬뽕국물까지 나오는 메뉴였다. 도대체 저렇게 먹는 괴물이 세상에 몇 프로나 된다고 메뉴에 만들어 놓았을까. 밥 먹을 때는 김이 위대해 보였다.

-길거리 농구는 3대3으로 하는 거 아니냐 근데? 2대2로 하재?

 

최대리는 김이 잠시 시계 쪽으로 고개를 들어보는 틈을 타서 물었다. 김의 콧등에 튄 짬뽕국물이 좀 신경 쓰였다.

 

-응? 아니. 3대3으로 할거야. 2시에 한 녀석 더 올 거야.

-누구? 나 아는 사람이겠지 물론?

-글쎄? 알려나…뭐 일단 좀 있다 보라구. 쿡쿡

 

김은 짜장면을 입 속에 가득 담은 채 쿡쿡거리며 혼자 웃었다. 검은 물이 몇 방울 튀었다. 참으로 더럽고 기분 나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최대리는 또 짜증이 났다. 울컥. 최대리는 참지 못하고 김을 공격했다.

 

-야 근데 너 일자리 새로 구했냐. 빨리 구해야지. 제수씨도 힘들 텐데 말야.

 

최대리는 불쑥 말하고 나서 이건 좀 심했나 하고 잠시 반성했다. 김은 묵묵히 짜장면을 먹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백수가 새 일자리야. 너 혹시 삶의 비밀에 대해 아냐?

 

김은 뜬금없이 최대리에게 삶의 비밀을 물어왔다. 최대리는 당황스러워서 얼굴까지 벌게졌다.

 

-야 그런 걸 알았으면 이렇게 사냐 내가?

 

김은 그건 그래 하고 또 혼자 쿡쿡 웃었다. 그러다가 최대리를 보며 제가 생각하는 삶의 비밀을 툭 내뱉는 것이었다.

 

-삶의 비밀! 백수와 삶의 기본기는 즐기는 것!

 

최대리는 한 숨을 푹 쉬었다.

 

‘내 참…삶의 비밀이라는 게 고작 그것?’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거미줄 같은 금이 가있는 벽에 걸린 시계가 초침을 절뚝절뚝 힘겹게 옮기고 있었다. 최대리는 꼭 자기 신세 같은 느낌이 들어 피식 웃었다. 김은 어느새 짜장면곱베기스페샬을 다 먹어치우고, 남은 단무지 그릇을 열심히 비우고 있는 중이었다. 창 밖의 아파트 단지 틈 사이로 구름이 흘러갔다. 최대리는 문득 그 구름을 삶의 비밀 같이 느꼈다.

‘저 구름 속에 삶의 비밀이 있을 것 같아. 세속의 틈새로 보이는 신비한 하늘, 신비한 흐름.’

 

최대리는 문득 인디언들을 떠올렸다. 붉은 얼굴과 깊이 있고 온화해 보이는 인상, 그리고 드넓은 대지와 코요테, 독수리, 그리고 추장의 지혜로운 옛이야기, 화톳불. 이런 것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어머니 대지와 아버지 태양. 이 세계에는 그렇게 멋들어지게 살던 인간들도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최대리 같은 멋없는 소위 문명인들이 모조리 짓밟아 버렸지만 말이다. 삶의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이 세계에서 퇴장하면서 삶의 비밀은 영원한 비밀이 되어버렸다. 최대리도 한 때 그들처럼 고고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최대리를 문명의 엘리트 비즈니스맨으로 만들어 주었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셔?

 

깜짝. 김이 갑자기 물었다. 최대리가 정신을 차리고, 김의 옆을 보니 웬 검은 사람이 앉아 있다. 흑인.

 

-하하. 자 인사해. 여기 농구하면서 만난 동지지. 트랑이라고 해. 아프리컨이지. 뭐 돈 벌려고 이 땅에 오신 불우한 이웃 동지 중 하나랄까. 헤헤

-아녕하세요

 

트랑이라는 흑인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사람 좋게 웃었다. 그리고는 크고 까아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최대리는 잔뜩 긴장해서는 어정어정 손을 내밀고 악수를 했다. 트랑은 스포츠 머리에 남색 점퍼를 입고, 속에는 줄무늬 티셔츠를 입었는데, 회사원 같지는 않고 공장직원 같은 느낌이었다. 트랑은 흠흠한 표정으로 큰 눈을 까막거렸다. 최대리에게 트랑은 처음으로 맞대면하는 정말로 새까만 아프리카인이었다. 최대리는 당황스럽고, 스스러워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처했다. 김이 뭐라고 운을 띄워주기만을 기다렸다.

 

-큭큭. 놀랬지 너. 하하 00기업 엘리트 비즈니스맨인 너도 오리지날 아프리컨 앞에선 긴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냐. 하하.

 

최대리는 김쪽을 노려봤다.

 

‘저 인간이 이 무지막지하게 어색한 상황을 타계할 말을 하기는커녕 나를 놀리고 있지 않은가.’

 

후. 속으로 한숨이 났다. 그렇다 김은 그런 인간인 것이었다. 최대리는 괜한 것에 기대를 건 자기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꼈다. 그리고 머리 속으로 재빠르게 도망갈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식사는 하셨나요?



 

3. 무엇이 시작되었나?



최대리와 김, 트랑은 봉황성을 나와 농구코트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정확히는 김과 트랑이 앞 서 걸어가고 최대리는 연행되는 죄인 마냥 뒤따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김과 트랑은 무슨 얘긴가를 쉴 새 없이 주고받았다. 무슨 슛이란 단어가 나오는 걸 보니 농구얘기인 모양이었다. 트랑은 의외로 키가 작았다. 178쯤 될까? 물론 일반적인 한국 남성보다야 큰 키지만 아프리카인 치고는 작은 게 아닌가 싶었다. 조금은 친밀감이 느껴졌다. 최대리는 똑같은 외국인이라도 흑인이라고 하면 출처를 모를 이상야릇한 경멸감과 불쾌감을 느껴왔었다. 언제부터일까? 라고 생각도 해보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흰 얼굴이나 까만 얼굴이나 사람 얼굴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김은 어떻게 저렇게 거리낌 없이 흑인 놈이랑 어울릴 수 있지?’

 

최대리는 무의식적으로 흑인이란 단어 뒤에 놈이라는 낮춤말을 붙이는 자기를 발견했다. 최대리에게는 무척 익숙한 말이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백인놈, 흑인놈. 왜 다 놈자를 붙여 얘기하는 게 편할까? 머리가 복잡했다. 아침부터 재수 없게 시작한 까닭인지 오늘따라 쓸데없는 잡념이 계속 최대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늘어졌다.

 

-어이 뭐해 하하 빨리와 빨리

-헤이 커몬

 

또 깜짝. 앞을 보니 김과 트랑이 어느 새 건널목을 건너가 있었다. 최대리는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을 놓는 일이 많을까. 참 이상한 하루였다. 뭔가 불안한 일이 생길 것도 같았다.

 

농구코트가 있는 공터에 가까이 다가가자 퉁퉁거리는 공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그 소리는 최대리의 심장박동소리와 더불어 점점 커져 갔다. 사실 최대리는 잔뜩 긴장하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든 감정이 일상에 감금된 그로서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신선한 심장박동.

 

  높게 둘러쳐진 그물 같은 철책 사이로 농구를 하는 세 사람이 보였다. 철책 주위에는 듬성듬성 풀이 난 평평한 땅이 있었고, 무엇 하나 거슬릴 것 없이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 저편 아래로는 조그만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냇물 편에서 깨끗한 흔들바람이 불어왔다. 길바닥의 모래 알갱이들과 아이스 바 껍데기, 그리고 최대리의 숙취도 날아갔다. 아까 찝찝한 기분으로 보았을 때와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마치 짜장면을 먹을 동안 다른 공간을 옮겨 놓았거나, 김이 최대리에게 최면을 걸어 다른 곳으로 데리고 온 것처럼.

 

농구시합 상대편 세 사람은 아무리 늙게 봐주어도 수능을 며칠 앞두어 세상살이에 초연해진 고3 쯤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그런데...

 

-아…아저씨들하고 하는 거냐, 오늘? 야 뭐야 너 우리랑 같은 중3이라며!

 

셋 중 제일 키가 큰 녀석이 소리쳤다. 결국 중3이었던 것이다. 최대리는 절망했다.

 

-아..아니 그게. 저기 저 수염 많은 아저씨가 하도 그래서…계속 사정사정하잖아

 

‘내가 리더랍니다’ 라고 얼굴에 써 붙인 듯한 녀석이 변명을 했다. 그 변명은 최대리를 더욱 절망의 나락으로 몰았다. 사정까지 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왕 온 거 그냥 하자.

 

끝장이었다. 체념의 경지까지 이르러서야 겨우 자신들과 농구 할 마음이 조금 생긴 중3의 꼬마들과 시합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최대리는 뒤편에 선 김과 트랑을 어이없지 않냐는 듯 할금 흘겨보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엇인가. 김과 트랑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저 둘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 거지? 지금 우리는 저 젖비린내 나는 꼬마 놈들과 시합이라는 걸 한단 말이다. 이제 30대가 다 되어 가는 어엿한 대한의 중년남성들이 말이다!'

 

-하하. 트랑 이거 되게 재밌을 거 같잖냐?

-오케이! 굿!

 

  놀고 있네 정말. 최대리는 당장 저 시건방진 꼬마들에게 ‘너희들 엄마 젖 좀 더 먹고 와라!’ 하고 소리 친 뒤 유유히 뒤돌아서 집으로 가고 싶었다. 철학이 무언지도, 사회가 무언지도, 정치가, 문학이, 음악이 무언지도 모르고, 어정버정 살아가는 저런 꼬마들과 시합을 해야 하다니 비참했다.

 

-음 그럼 아저씨들 먼저 해요. 약속대로 전 후반 각각 20분씩이에요. 경기 룰은 일반 농구 그대로고요. 코트는 풀코트 써요.

 

최대리는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뭐? 이놈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너희들 먼저..읍.

-에헤헤. 그래그래 우리가 먼저 하자구.

 

느닷없이 김이 최대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페어플레이를 위해서 괜히 애들 겁주지 말라나 뭐라나. 이미 최대리의 스트레스는 한계치에 다다라 있었다. 어른으로서의 권위가 죄다 무너져 버린 듯 불쾌했다.

 

-에헤헤. 자 그럼 시작 하자구!

 

  김이 가볍게 공을 튀기기 시작했다. 어쨌든 시작된 일에는 적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시작 되었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최대리는 적응을 할 게 분명했다. 적응해야했다.




4. 시작!



  김은 연신 앙글거리며 상대 코트로 공을 옮긴다. 그 어정쩡한 드리블이라니. 공은 튀길 때마다 높낮이, 방향을 모두 달리하는 것이다. 김은 그것을 눈으로 쫓으며 손을 갖다대느라 바쁜 지경. 공을 빼앗기고 만다. 중3꼬마 셋 중 제일 키가 작은 녀석이다. 꼬마녀석은 굉장히 낮은 드리블을 구사해서는 다람쥐 마냥 잽싸게 스리포인트라인 오른편으로 달려온다. 너무 낮은 드리블이라 최대리로서는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다. 지체 있는 어른이 꼴사납게 사타구니를 벌리고 자세를 낮출 수도 없다. 꼬마는 전봇대처럼 무뚝뚝하니 서있는 최대리를 휙 재치고 골대를 향해 탁 튀어 오른다. 최대리의 심장이 철렁. 아, 그때 복병 트랑이 기세 좋게 하늘로 붕 날아오른다. 꼬마는 마술을 부리듯 트랑의 넓적한 손바닥 옆으로 가볍게 공을 띄워 보낸다. 공은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그물 안으로 쏙.

 

‘저런 바보 같은 깜둥이!’

 

최대리는 속에 불이 났다. 완전한 패배였다. 그러나 김과 트랑은

 

-하하, 고 녀석들 잘하네.

-오우, 유아 베리굿!

 

이런 세상 좋은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다. 저놈들은 자존심도 없나? 최대리는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 빚은 꼭 갚아 주리라 다짐하는 것이다.

 

-너, 꼬마 이름이 뭐냐?

-명운데요.

 

  최대리는 머리 속의 디렉토리를 열심히 검색했다. 퍼뜩 자기를 괴롭혔던 남명우라는 상사를 떠올린다. 최대리는 그렇게 명우라는 꼬마를 남명우에 대치시켜 더욱 복수심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이것은 저가 회사 일을 할 때 경쟁심에 불을 붙이기 위해 종종 쓰는 방법이었다. 농구시합도 경쟁이렷다. 절대 질 수 없다.

김이 다시 드리블을 시작한다.

 

-야! 패스!

 

최대리가 상대코트로 뛰어가며 김에게 외친다. 김은 공을 머리 위로 올려 힘껏 던진다. 오버헤드패스. 역시나 패스도 허점투성이다. 공이 너무 높이 떴다. 최대리는 순간 정지. 최대리는 점잖게 서서 공이 제 손에 불시착하기를 기다린다. 그 틈에도 꼬마들은 열심히 몸을 움직여 공을 공중에서 낚아챈다. 이번에는 꼬마들 중 제일 키가 큰 꼬마. 중3 주제에 180 정도는 되어 보이는 녀석이다. 최대리는 재빨리 그 꼬마를 향해 뛰어간다. 그런데 이 녀석이 키만 큰 것도 아니고 빠르기도 빠르다. 따라잡기가 힘들다. 농구코트 중앙의 센터서클 근처에 있던 김이 가까스로 막아선다. 트랑은 아까의 명우라는 그 키작은 꼬마를 지키고 서 있다. 최대리는 리더녀석을 막으면 되는 것이다. 대장 꼬마녀석은 어디에? 대장 꼬마녀석은 이미 최대리를 슬쩍 지나쳐 골대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허를 찔렸다. 키 큰 꼬마는 김의 머리 위로 쓱 오버헤드패스. 대장 꼬마는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온 공을 받자마자 폴짝 뛰어 올라 가볍게 점프슛을 성공시킨다.

 

  아, 또 한 골. 순식간에 최대리 일행은 꼬마들에게 실점을 하고 있었다. 최대리는 참을 수가 없었다. 최대리는 공을 다시 잡고 곧장 꼬마들쪽 코트로 돌진해 간다. 모래코트의 유성의 드리블을 너희들이 제지할 수 있을 소냐! 김과 트랑도 얼떨결에 그를 따라 뛴다.

 

-준아! 저 바보 아저씨를 막아.

 

대장 꼬마 녀석이 지시를 내리자 키 큰 꼬마 녀석이 최대리앞을 가로막는다. ‘젠장 그럼 내가 결국 바보 아저씨냐!’ 최대리는 막무가내로 앞으로 돌진한다. 세상은 그런 거야, 벽은 그냥 뚫어버리고 가는 거야. 텅! 키 큰 꼬마가 뒤로 튕겨져 날아간다. 피하지 않은 것이다. 최대리는 꼬마가 당연히 겁먹고 피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은 게다. 잠시 시합이 멈췄다.

 

-야, 괜찮아? 다쳤어? 임마 달려오면 피해야지!

 

최대리가 준이란 키 큰 꼬마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러자 명우란 꼬마가

 

-아저씨! 일부러 그런 거지! 치사하게!

-뭐야!? 이 녀석이 어른한테 함부로!

 

최대리는 결국 폭발하고 만다. 김과 트랑이 야야 왜 그래 하며 최대리를 말렸다.

 

-야야, 무슨 전쟁하러 온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목숨 걸어어~.

 

김이 수더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최대리는 정색을 하며

 

-전쟁도 싸움이고, 스포츠도 싸움이야. 결국 이겨야 하는 건데 목숨 안 걸게 됐냐!

-아저씨는 농구시합이 무슨 애들 쌈박질인 줄 아세요!

 

명우가 다시 반박했다. 최대리의 고삐가 풀려버린다.

 

-이것들이 진짜!!!

-아저씨는 참 이상하네요. 우리들은 놀려고 온 거지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그만해, 명우야! 어른한테 그러면 안돼.  둘 다 열심히 하다 그런 건데 뭘. 괜찮아요. 아저씨. 드리블 멋지던데요.

 

준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지를 탁탁 털고 일어났다. 최대리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는 여유까지 보였다. 어이없게도 뭔가 위아래가 뒤바뀐 듯한 상황. 대장 꼬마는 속히 시합을 다시 시작하자고 말을 했고, 꼬마들의 공격으로 시합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10분쯤 지났을까? 어느새 점수차는 27:3까지 벌어져 있었다.



-야, 제대로 좀 할 수 없냐? 애들한테 이게 무슨 창피야!

 

잠시 동안의 휴식시간이 주어졌고, 그 틈을 타 최대리는 김에게 호통을 쳤다.

 

-뭐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애들이 잘하는 걸 어쩌겠냐.

 

김은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며 여전히 느긋한 태도로 말하는 것이었다. 트랑도 옆에서 씨익 웃을 뿐이었다. 최대리는 점점 더 열이 올랐다.

 

-너 도대체 시합에 이길 맘이나 있는 거야?!”

-아니, 별로.

 

김은 계속 문자 보내는 일에 집중하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최대리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이길 생각도 없으면서 뭐 하러 시합을 시작한 것이란 말인가. 뭐 하러 이런 귀찮고 아무 소용가치가 없는 일을 벌인 것인가 말이다. 최대리는 맥이 탁 풀려버렸다. 당장 그곳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 잠이나 실컷 잤으면 싶었다.

 

-헤이~. 그냥 재미께 해요.

 

트랑이 천하태평하게 웃으며 말했다. 최대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깜둥이는 찌그러져 있어.

 

-저 아저씨들~ 이제 시작해요!

 

대장꼬마가 소리쳤다.

 

-어 이거 벌써 시작인가. 하하하

 

김과 트랑은 사람 좋게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최대리는 꼭 저만 악역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최대리는 더 이상 이 시합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철봉 위에 걸어놓은 검은 양복 외투를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야! 너 뭐해?

 

김의 일자로 웃고 있던 눈이 동그래졌다. 

 

-나 그만 간다.

-뭐? 가아?

 

중학생 꼬마들과 김 그리고 트랑의 눈길이 일제히 최대리에게 쏠렸다. 최대리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꼭 시합에서 질 것 같으니 미리 손 빼는 양이지 않은가. 사실 최대리는 평소에도 일을 할 때 승산이 없는 일에는 아예 끼어 들지 않았기에, 항상 성공만 하는 샐러리맨으로 사내에 유명해졌던 것이었다. 최대리에게 패배는 그림자조차 얼씬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 질 싸움을 왜 해? 김이 달려왔다.

 

-이봐 내 하나만 말해두지. 졌다고 생각하고, 안 된다고 생각하면 벌써 시합은 거기서 끝나. 그래도 아직 이길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하면 시합은 계속 되는 거야. 게다가 우린…

 

김은 꽤 그럴싸한 말을 하고 있었다. 뒤에 말까지는 대장꼬마의 최대리를 향한 도발 때문에 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거기 아저씨는 그냥 가는 거예요? 질 것 같아서 그래요?

 

최대리는 대장꼬마의 말을 듣자마자 다 입었던 외투를 바닥에 벗어 던졌다.

 

-웃기지마! 이제 본때를 보여주마.

 

김과 트랑이 피식 웃었다. 잔잔한 바람이 일었다. 최대리는 이상하게 자기 심장이 조금씩 콩닥거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왜 이러지?

 

  시합은 다시 시작된다. 최대리팀부터 공격이다. 김이 트랑을 보고 눈웃음을 보내는 듯 하더니, 곧 공이 트랑에게로 날아간다. 트랑은 공을 받아서는 재빨리 상대코트로 달려간다. 최대리가 쫓아가기 벅찰 만큼 빠르다. 역시 아프리컨은 운동신경이 뛰어난 건가. 그래봤자 나보다 잘하지는 못하겠지. 저런 깜둥이가. 최대리는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뛴다. 트랑은 그런 최대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린다. 트랑이 앞으로 돌진하자, 우선 명우가 그를 가로막고 손을 뻗어 스틸을 시도한다. 트랑은 돌연 스핀무브를 사용해 공을 한 손으로 잡고 뒤로 한 바퀴를 돌아 명우 녀석을 가볍게 제친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장꼬마의 가랑이 사이로 공을 통과시킨 뒤 옆으로 뛰어가 다시 받는다. 뛰어오른다. 붕. 준 역시 뛰어 오른다. 준의 큰손이 허공에 펼쳐진다. 트랑은 공중에서 몸을 웅크리더니 몸을 조금 비틀어 준의 겨드랑이 사이로 공을 띄워 보낸다. 공은 철썩 소리를 내며 그물에 빨려 들어간다.

 

-우와아!

-오오 트랑 드디어 한 건 하는 구나!

 

  굉장한 플레이였다. 최대리는 입이 딱 벌어졌다. 세상에 저런 플레이를 실황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최대리는 순수한 설레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곧 최대리의 마음에서는 일그러진 질투의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저 녀석에게도 질 수 없어. 깜둥이녀석한테는.

 

-준아! 우리도 하나 보여주자!

-오케이! 민진아 그럼 그거 하자!

 

  준이 대장꼬마에게 ‘그거 알지’ 하는 듯한 손짓을 보내며 외쳤다. 대장꼬마 민진도 고개를 끄덕인다. 명우도 그 둘을 보고 피식 웃는 것이었다.

명우가 우선 드리블을 시작한다. 우측 모퉁이의 사이드라인을 따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돌진해 온다. 최대리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명우는 최대리 쪽으로 똑바로 달려오는 것이다. 최대리는 무의식적으로 사타구니를 벌리고 자세를 낮춘다. 거의 코 앞까지 왔을 때 명우는 최대리를 똑바로 응시한 채 빙긋 웃더니 왼편으로 공을 던진다. 노룩패스. 왼편에서 민진이 달리고 있다. 민진은 패스를 받아들고 달린다. 김이 막아선다. 민진은 트랑쪽을 흘끗 본다. 김도 트랑쪽을 본다. 그 틈에 민진은 김의 가랑이 사이로 공을 통과시킨다. 바운드 패스다. 프리스로 라인에 있던 준이 원 바운드 된 공을 받아 튀어 오른다. 트랑이 날아오른다. 준은 슛을 하지 않고, 슬쩍 어깨 뒤로 공을 흘려보낸다. 달려오던 민진이 받아 공중에 있는 둘을 지나쳐 가볍게 레이업슛.

 

  완벽했다. 김과 트랑이 탄성을 질렀다. 최대리는 넋 나간 사람 마냥 공이 지나쳐간 빈 그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대단했다. 무엇보다 아까 명우 녀석이 최대리를 똑바로 보고 방긋 웃었을 때, 그건 결코 비웃음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최대리가 시합 초반 때와 달리 열심히 시합에 임하는 것에 대한 반가움의 미소. 또한 그냥 재미있다는, 신나 죽겠다는 아이의 웃음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시합을 하면서 이렇게 멋진 연출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최대리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과 트랑쪽을 바라보았다. 녀석들은 시합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양 꼬마녀석들을 칭찬하느라 바빴다. 최대리는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저들은 골을 더 넣고 싶지 않은가? 자꾸 자꾸 넣어서, 저 꼬마녀석들과 큰 점수차를 내고 싶지 않은가. 시합이 다시 시작되었다. 최대리가 드리블을 시작했다. 꼬마녀석들. 신나 죽겠다는 표정의 꼬마녀석들이 눈 앞에 있다.

 

‘인정할 수 없어 그런 건.’

 

최대리는 순간 욱하고 무언가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돌진이다. 최대리는 알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 앞으로 앞으로 뛰쳐나간다. 넥타이가 목 뒤로 날카로운 검처럼 뻗힌다. 명우가 막는다. 체인지 드리블. 드리블 하는 손을 바꿔 왼쪽 방향으로 컷인해 들어간다. 민진이 막는다. 공을 뒤로 보내 백비하인드 드리블로 제친다. 점프! 준도 점프. 최대리는 중심을 뒤로 옮긴다. 페이드아웃 슛. 철썩! 짜릿한 기분. 최대리가 모래 코트의 유성일 때 맛보았던 것 같은 환희.

 

쿵! 최대리는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져 코트 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만다. 아득해지는 시야. 하늘이 윙윙거리더니 까매진다. 정전이 되었을 때 촛불을 켠 것처럼 희미한 구멍으로 그리운 영상이 움직인다.

 

지금은 죽고 없는 최대리의 아버지가 아직 어린 그에게 농구를 가르쳐주고 있다. 아버지는 그를 진우라고 부른다. 그렇다 그는 ‘진우’다. 진우가 위태위태 드리블을 한다. 좀처럼 제대로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진우에게 좀 더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가르친다.

 

‘농구를 할 때는 공격이든 수비든 늘 자세를 낮추어야 한단다.’

 

그것은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장소가 바뀌어 집 안 거실. 진우는 자기는 농구를 하기엔 키가 너무 작다고 시무룩해 한다. 부엌에 서 있던 역시 지금은 없는 어머니가 말한다.

 

‘글쎄, 엄마가 농구는 잘 모르겠지만. 덩크랑 블로킹을 못하면 3점슛이랑 드리블 그리고 패스 같은 게 있잖니. 그거면 된 거 아니니?’

‘잘하고 싶어요!’

‘자라고 싶다고?’

 

중학교 농구부의 체육 선생님.

 

‘아뇨! 잘하고 싶다고요.’

‘진우야, 잘하고 싶다는 건 자라고 싶다는 게 되어야 한단다. 승부서 이기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키우는 게 중요한 거야. 잘 봐!’

 

체육선생님은 무릎을 굽히고, 탄력 있게 점프한다.

 

‘상대보다 높게 뛰고 싶으면, 우선 상대보다 더 낮아져야 한다.’

 

팔을 부드럽고 곧게 펴며 바람을 어루만지듯 스냅.

 

‘가장 아름다운 슛은 강함과 유함의 조화로부터 나온다.’

 

시간이 정지된 듯 허공의 공만이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인다. 철썩!

 

‘어때 진우야 아름답지 않니? 승부에 이기는 사람보다, 매 순간 이런 아름다움을 만드는 선수가 되렴.’

‘아... 네.’

 

운동장에 아이들이 북적댄다.

 

‘봐봐 이게 스핀무브라는 거야.’

 

진우는 공을 한 손에 잡고 등 뒤쪽으로 해서 잽싸게 한 바퀴를 돌아 드리블 방향을 바꾸는 묘기를 부린다. 아이들이 탄성을 지른다.

 

‘와아~ 나도 가르쳐줘.’ ‘나도! 나도!’

‘OK! OK! 모두 잘 봐, 천천히 다시 할게.’

 

어둠이 내린 공터. 진우는 늦은 시간까지 드리블과 슛 연습에 열중한다. 만 번째의 슛을 성공시키기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다짐한 진우였다. 달빛이 보드랍게 공터를 비춘다. 삐뽀삐뽀!

 

‘아빠! 엄마!’

 

할머니 품에 안겨 울부짖는 진우의 모습...

영상이 끊기고 최대리의 의식이 조금씩 돌아왔다. 최대리는 눈을 떴다. 흐릿하게 까만 무언가가 보였다. 또 정전인가.

 

-괘차나요?

 

트랑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김도 괜찮냐고 물어본다. 꼬마들도 주위에 모여 있다. 최대리는 아, 괜찮아 하며 벌떡 일어났다. 남은 시간, 시합은 막상막하로 이어졌다.




5. 잠시 쉼



  트랑의 활약으로 인해 전반전을 '42:30'의 점수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10분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아이들은 음료수를 사먹는다며 슈퍼마켓으로 달려갔다.

 

-우리도 한잔씩 하자구. 자자 어른들의 영양음료야.

 

김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제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맥주였다. 김은 싱글거리며 트랑과 최대리에게 맥주 캔을 하나씩 건넸다.

 

-참, 머리는 괜찮냐?

-응.

-트랑이 어디서 배웠는지 지압 같은 걸 해줬었어. 고맙다고 해.

-아 고맙습니다.

-아뇨, 별거 아네요. 헤헤 우리 고향 젼통치료뻡이래요. 아부지한테 배운 거죠.

-야, 근데 너 진짜 잘하더라. 모래코트의 혜성이란 것도 진짜였나 봐.

 

최대리는 딱 잘라서 '혜성'이 아니라 '유성'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었다.

 

-마자요, 졍말 잘 하시돈데요.

-아니요, 그쪽 분이야 말로.

 

최대리에게는 자기보다 한참 수준 위인 트랑이 자기를 칭찬하는 것이, 가증스럽다고 느껴졌다. 안 그래도 아까 본 이상한 영상들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최대리였다.

 

-야, 당연하지. 얘가 이래 뵈도 NBA에 있었던 애야아.

-엔비에이?!

 

최대리는 깜짝 놀랐다. 무슨 공장이름을 잘못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트랑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멋 적은 듯 웃고 있었다. 어쩐지 쓸쓸한 표정 같기도 하고.

 

-미국 프로농구 말이야? 대단한데!

-그러케 대다난 팀 아니어써요. 인디아나페이서스라고, 77년부터 플레이오프는 한 버도 몬 나가찌요. 저 그냥 후보여써요. 경기에 나가 본 날도 업써요. 대단 아내요. 할렘바닥 전전하며 살던 그저 그런 놈이여찌요.

 

트랑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김이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 트랑을 바라봤다. 김도 맥주를 들이켰다. 얼떨결에 최대리도 한 모금 들이켰다. 셋은 서로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은 돈 없는 공사판 노동자지만 언제는 꼭 다시 농구 하게 될 거십니다.

 

트랑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눈시울이 붉었다. 왠지 모를 일이지만 최대리의 머리 속에는 NBA의 무대에서 호쾌한 덩크슛을 내리꽂고 있는 트랑의 모습이 스쳐 지났다. 트랑의 바람대로 그는 훌륭한 농구선수가... 아니 이미 트랑은 훌륭한 NBA선수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준비 운동 좀 하고 오게씁니다.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태양이 트랑에게 한껏 햇살을 쏟아 부어 주었다. 강가로 달려가는 트랑의 뒷모습은 드넓은 아프리카 평원의 들소 같았다. 그의 쓸쓸한 삶은 야생의 생명력에 뒤덮여 있었다. 아, 그는 정말로 아프리컨이었다.

 

-할아버지대에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노예로 팔려왔대. 같이 노예로 팔려왔던 할머니랑 트랑의 아버지를 낳았는데, 주인한테 받는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할렘가로 도망쳤다는군. 그렇게 살다가 트랑의 조부모가 모두 병으로 죽고, 트랑의 아버지만 고아가 되어 살아남았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트랑의 아버지는 한국전에 지원했고, 거기서 트랑의 어머니를 만난 모양이야. 아버지는 아프리컨, 어머니는 한국인. 미국이라는 땅에서 살아남기에는 최악의 조건이지.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아직도 저렇게 꿈에 차 있달까...? 저 친구는 정말 사람 같아. 나 같이 평탄하게 살아 온 부류랑은 다른 오라가 느껴져.

-그 부모는 모두 살아 있대 그래?

-아니... 저 친구도 참 쓸쓸한 인생이지.

-같은 신세구나 나랑...

-뭐?

-아냐 아무 것도.

 

김이 남은 맥주를 왈칵 들이켰다. 최대리도 그렇게 했다. 최대리는 트랑은 '산다는 게 무엇일까?' 라는 기분 나쁜 물음을 던져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 나는 이 사회에 태어나버렸고 이미 경쟁은 시작되었고, 이겨야한다. 삶이든 시합이든 그것뿐이다.' 최대리는 주문을 외듯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가에서 생전 처음 듣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트랑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프리카 말로 부르는 듯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아프리카의 대기가. 그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늘의 구름은 너무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좋군.

 

김이 말했다.

 

‘그 것 뿐일까요... 아버지 어머니.....'

 

최대리는 빈 맥주 캔을 들어 들이켰다. 아직 몇 방울의 맥주가 남아 있었다. 배가 고픈가? 꿈이 고픈가......


 

6. 모래코트의 유성 VS 하얀 하이에나



  슈퍼에 간다던 아이들은 다른 사내 하나를 데리고 왔다. 자기들에게 너무 불리한 경기라나. 최대리는 오히려 잘 됐다고 그 남자를 시합에 참가시켜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대리는 곧 제가 실수를 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다름 아닌 자신의 동갑내기 상사인 이과장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과장은 김을 해고시킨 주범이기도 했다. 이과장은 최대리가 넘어뜨린 준의 삼촌으로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준의 호출로 후다닥 뛰어나온 모양이었다. 항상 힘이 들어간 리젠트머리이던 이과장의 머리카락은 자다가 막 깨어난 듯 수많은 분수대를 연출하고 있었다. 지퍼를 반쯤만 올린 녹색 점퍼, 헐렁한 바지. 한 쪽 매듭이 길게 늘어진 운동화. 이과장의 회사에서의 경직된 이미지가 이상스레 잘 떠오르지 않았다.

 

-차암, 자네들도 할 짓 없군 그래. 애들이랑 놀 시간 있으면 일들이나 하게. 일들을.

 

그런 꼬락서니로도 이과장은 부하를 나무라듯 소리쳤다. 뒤에 선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보세요. 여긴 회사가 아니고, 그쪽 분이랑 저희 나이도 같은데 서로 존대합시다.

 

김이 이과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조금 흥분한 모습이었다. 최대리로서는 처음 보는 김의 모습이었다.

 

-여어~ 김대리는 요즘 벌이가 괜찮은 가봐?

 

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최대리에게는 참 난처한 상황이었다. 트랑은 뭐가 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자아, 어찌되었든 시작한 게임이니 끝을 보지 그래들.

 

이과장이 최대리와 김 쪽을 보며 말했다. 시합은 다시 시작.

 

  아까 최대리와 충돌했던 준이 빠지고 대신 이과장이 들어왔다. 시합의 분위기는 뭔가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 이과장에게 김은 항상 눈엣가시였다. 이과장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표독스럽게 공부하여 그 어렵다는 자수성가를 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과장은 부르조아 도련님으로 태어나 순탄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사람을 좀 병적으로 싫어했다. 안타깝게도 김이 딱 그 케이스였던 것이다. 뭐 김이 거들먹거리며 부모의 원조로만 살아가는 부류는 아니었지만, 부르조아 특유의 여유로움은 가끔씩 오만함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김은 강박관념이 없었고, 쫓기는 것도 없었고, 자유로웠다. 이과장에게는 그런 김이 철없이 날뛰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여겨졌다. 사실, 최대리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과장과 같은 심정을 느낄 때가 없잖아 있었다. 늘 회사에서 이과장과 김, 즉 김대리는 서로 옥신각신 했었다. 그것은 마치 톰과 제리를 드라마로 보는 것과 같았다. 그러던 중 IMF가 터지고, 결국 이때다! 하며 톰이 제리의 목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언제나 둘 사이에 끼면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피해를 보는 최대리였다. 난처했다. 최대리는 이과장을 잘 알고 있었다. 이과장은 최대리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둘은 한 때 라이벌이었던 것이다. 

 

  고등학교시절 점심시간에는 토요일마다 반 대항 경기가 있었다. '모래코트의 유성'이라 불리었던 최대리는 1학년 4반의 에이스였고, 이과장은 1-6반의 에이스로 '햐안 하이에나' 라고 불리었다. 하얀 하이에나라는 별명은 우선 이과장의 하얀 피부에 기초한 것이고, 다음으로는 이과장은 항상 상대방의 에이스가 지친 후반에 투입되어, 상대방 에이스를 저돌적으로 공격하며 다량득점을 했기에 붙은 것이었다. 그런 이과장에게 최대리만은 밀리지 않았었다. 1-4반 대 1-6반의 첫 경기가 있던 날. 하얀 하이에나는 역시 후반에 투입되어 몇몇 아이들에게 부상을 입히고, 모래코트의 유성에게도 덤볐다. 경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1-4반이 2점차로 지고 있을 시점이었다.

  하얀 하이에나는 100m 레일을 전력 질주하듯 거리낌 없이 골대 쪽으로 뛰어왔다. 아니, 골대라기보다는 모래코트의 유성에게로 달려들었다. 모래코트의 유성이 유일한 수비. 물러설 수 없었다. 하얀 하이에나는 머리를 앞으로 좀 숙이더니, 마치 코뿔소 마냥 달려드는 것이었다. 모래코트의 유성은 하이에나가 머리를 숙이는 동작의 틈을 타, 슬쩍 옆으로 한 발짝 움직였다. 마치 투우의 한 장면처럼. 손을 뻗었다. 공의 촉감, 낚아챈다. 모래코트의 유성은 그대로 로켓처럼 튀어나갔다. 1-6반의 수비수 3명이 가로막았다. 모래코트의 유성은 순간 정지했다. 곧바로 하늘 높이 점프. 바람을 어루만지듯 스냅. 공은 정확한 포물선을 그렸다. 철썩! 쓰리포인트 슛. 1-4반의 역전승으로 그 시합은 마무리되었다. 4반쪽 코트에서는 하얀 하이에나가 두 눈에 차가운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그 시합 이후 하얀 하이에나는 악착 같이 최대리에게 도전해왔다. 그 당시만 해도 최대리 역시 부르조아과였기에, 본의 아니게 이과장의 가슴에 불을 당기고 만 것이었다. 하이에나와 일대일 승부를 한 것도 수십 차례. 번번이 패하던 이과장은 어느 순간 학업에 전념한다며 농구 판에서 사라졌고, 머지않아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최대리도 그렇게 되었다.

 

  최대리가 기억하기로 이과장은 2학년 때부터 학생회장을 2년 연임했고, 그 가산점으로 소위 최고 명문대학에 진학했다. 늘 이과장은 최대리를 복도에서 마주치면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곤 했었다. 입사시험에 합격하고 부서의 상사로 설정되어 있는 이과장을 처음 만났을 때, 이과장이 지었던 차가운 미소는 아직도 최대리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이과장의 드리블로 후반전이 시작된다. 꾸준히 농구를 해온 듯한, 낮고 정교한 드리블. 이과장은 느긋하게 걸어서 최대리쪽의 진영으로 온다. 김이 '젠장' 하며 달려들어 공쪽으로 팔을 뻗는다. 무모하다. 이과장은 백비하인드 드리블로 공을 다른 손으로 가볍게 옮기고는 앞으로 달려든다. 언더핸드 레이업 자세로 프리스로라인에서 점프. 트랑과 최대리가 동시에 튀어 오른다. 이과장은 씨익 웃더니 그대로 몸을 골대 쪽으로 기울인 뒤 레이업 슛. 퍽! 철썩. 골인.

이과장은 트랑을 보며 피식 웃었다. 최대리가 트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움켜쥐고 있다. 이과장이 레이업을 하면서 팔꿈치로 눈을 내리 찍은 것이었다.

 

-어이쿠쿠 이거 미안허이. 아 그르게 착실히 공장기계나 돌리지. 허허허.

-뭐라고!

 

김이 달려들어 이과장의 멱살을 쥐었다. 이과장은 김의 손을 냅다 뿌리쳤다. 툭 내 뱉는 한마디.

 

-실력으로 덤벼, 실력으로. 안 그런가, 최대리?

-네...

 

최대리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시합은 계속 되었다. 김이 공을 받아서는 다짜고짜 이과장 쪽으로 달려간다. 민진과 명우가 막으려고 달려온다. 이과장이 물러서라고 손짓한다.

 

-김대리 한 번 해보지 그래. 허허.

 

이과장이 씨익 웃는다. 김이 주춤주춤 드리블하며 다가간다. 뚫지 못하고 제자리서 어찌할 줄 모른다. 트랑이 패스신호를 보낸다. 김은 보지 못한다. 이과장과의 신경전만 신경 쓴다.

 

-30초 바이얼레이션이에요!

 

명우가 소리친다. 최대리와 트랑이 푸우 한숨을 내쉰다.

 

-뭐하고 있나 자네. 허허.

 

이과장이 피식 웃으며 김의 공을 받아간다. 김은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김은 그 뒤부터 시합보다는 이과장에게 다리를 걸거나, 밀치거나, 팔꿈치로 내리 찍을 기회를 노리거나 하는 등의 일에 집중하는 듯 했다. 이과장과의 싸움에 목숨을 거는 김을 보며 최대리는 전반전 때 자기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부끄러웠다. 시합의 열기가 더해가며 점수 차는 67:40까지 벌어졌다. 최대리 쪽은 거의 점수를 얻지 못했다. 트랑은 눈을 다쳐 원근감이 없었고, 김은 마구잡이로 덤비긴 했지만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최대리는 더 이상 '모래코트의 유성'의 위치가 아니었다. 이과장은 광기에 찬 듯 저돌적으로 슛을 했다. 하얀 하이에나가 복수를 위해 돌아온 것이었다. 명우와 민진이 콤비 플레이를 펼치며 김을 재치고, 슛을 성공시켰을 때, 김은 완전 녹초가 되어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

 

  준이 누구 휴대폰이냐며 최신 유행가가 투박하게 흘러나오는 전화기를 들고 왔다. 김의 것이었다. 시합이 잠시 중단되고, 김은 전화를 받았다. 짧은 통화가 끝나고, 김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미안하다. 가봐야겠어.

-여어 꽁무니 한 번 잘 빼시네 그래. 시합은 끝내고 가야 않겠어?

 

이과장이 잔뜩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김은 이과장을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어두운 낯으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 집사람 좀 아파.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거든.

-어? 어디가? 말 안했었잖아.

 

김이 머뭇거렸다. 조금 아픈 것이 아니라 크게 아픈 게 분명했다.

 

-퇴직금 타서 병 고친다더니. 그래 아직도 못 고쳤나? 하긴 그 병이 쉽게 낫는 게 아니라지?

-입 닥쳐!

 

김의 짧은 외침. 시종 밉살스런 미소를 짓던 이과장의 입가가 굳어졌다. 그러더니 곧 뭔가 퍼부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봐. 자네의 그런 태도가 늘 문제야. 자네는 항상 회상일이 아무리 바빠도 부인이랑 데이트 어쩌구 하며, 일찍 퇴근을 했지. 아내사랑? 그런 것도 다 자네처럼 여유로운 자들의 몫이지. 나 같은 인간은 늘 바쁘게 일하고 또 일할 수밖에 없어. 그렇게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사회적 비난뿐이야. 가정적이지 못한 남편으로, 여성을 하수인 취급하는 남성 가부장으로, 일에만 미친 일벌레로, 아이들에게는 돈 벌어 오는 자동기계쯤으로. 하지만 말야. 이 세상의 발전은 나 같은 사람들의 힘으로 이루어져 온 거야. 자네 같은 부류가 등 따시게 집에서 가정의 화목, 삶의 질 운운하며 사랑놀음하고 있을 때, 나 같은 인간은 지옥 같은 서류들과 싸운다고. 자네는 늘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 안락한 것만 찾는 패배자일 수밖에 없어! 시작은 몰라도 최후의 성공은 나의 것이야. 자네가 도망간다면 이 승부도 이제 나의 승리야. 

-승부? 누가 당신과 승부한다고 했지? 아까는 트랑 때문에 화가 치밀어서 그런 것 뿐야. 당신과 난 승부할 수 없어. 우리는 방향 자체가 다르니까. 나는 별로 승리하고픈 마음이 없어. 승리에 대한 갈망은 당신의 룰에서만 적용되는 법칙이야. 굳이 찾는다면 나는 사랑의 승리를 원할 뿐이지. 당신에겐 일이 소중하겠지만 나는 아내와 내 삶이 더 소중한 거야. 그래, 당신은 당신의 삶을 버리고 성공해서 즐거운가? 그렇게 삶이 재밌어서 주말에 낮잠이 퍼 자고 있는 건가?

-자네, 그 잘난 입으로 계속 나불대 보게.

 

이과장과 김은 서로를 격렬하게 노려보았다. 점화는 벌써 이루어졌고, 폭발 카운트는 이미 시작되었다. 말리지 않으면 폭발할 것 같은 순간.

 

-그쯤 해두시죠! 너도 급하다며 빨리 가봐.

-그래요. 빠리 가보세오.

 

최대리가 소리쳤고, 트랑이 거들었다. 이과장은 이것들이 꼴값 한다는 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미안하다, 진우야. 남은 시합 재밌게 해라. 가능하면 이겨주고 말야. 쫌 화가 난다 그래도. 

김이 예의 그 장난 끼 그득한 미소를 찾으며 말했다. 최대리는 약간은 자신 없다는 듯 '그래...'하고 짧게 답했다. 트랑은 살짝 윙크를 보냈다. 김은 슬픔이 꺼지듯 피식 웃고는 도로변으로 달려갔다.

-허허 이것 참. 대단한 드라마 찍네 그래들. 하긴 암 걸린 부인이라면 충분히 드라마틱 허지. 사랑을 위해 달려가는 남편 참 아름답지 않나 그래.

강변의 공터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해가지는 것과 동시에 아이들과 트랑, 최대리의 마음도 저물어 갔다. 이과장만이 홀로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주홍빛 바람이 일었다.

 

‘누구나 아픔과 시련이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강해지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강함을 선택하느냐는 것이다.’

 

최대리의 눈에 붉게 저무는 태양이 들어왔다. 아프리카의 대기를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다.

 

  종료시간은 휴대폰 알람으로 맞춰두고, 준을 최대리 쪽으로 넣는 것으로 시합은 재개되었다. 이과장은 득의양양하여 마구잡이로 돌진해왔다. 물론 최대리는 이과장을 막을 수 없었다. 대신 간간히 2점 슛을 넣는 것으로 김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시늉을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준은 삼촌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꼈는지 열심히 수비를 해주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점수는 86:50. 종료 10분쯤을 남겨두고 1분간 휴식.

 

-저하테 패스르 해주세요.

 

트랑이 한 쪽 눈을 찡그린 채 최대리에게 말했다. 최대리는 측은한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눈이..

-컥정 마라요. 저 프로농구서수여써요. 저, 미더요.

 

그렇게 말하고는 트랑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그럽게 웃었다. 아프리카의 햇살은 얼마나 눈부실까. 최대리는 트랑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의 대기를 호흡하며 자란 이들은 다들 트랑 같은 유쾌한 마법을 부릴 수 있을까. 적어도 그들의 숨결만은 진실하리라. 최대리는 햇볕 같은 검은 숨결을 믿어 보기로 했다.

 

-네. 믿어보죠.

-땡큐 지누.

-저기, 아저씨들 저도 열심히 삼촌 막아볼게요.

 

준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트랑의 검고 큰 손이 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최대리의 눈에 트랑의 검은 손과 준의 검은 머리 틈에서 마법처럼 노란 온기가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저, 트랑씨 아까 그 노래 한 번 더 불러줄 수 없어요?

-슈얼!

 

트랑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트랑의 목소리는 붉은 바람에 나부끼며, 어머니의 품처럼 그윽한 온기로 마음을 적셔왔다. 고조곤히 흐르는 검은 대지의 노래. 이과장 쪽도 트랑을 말끄러미 바라본다. 순간 강가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잠시 아프리컨이 되었다.

 

-고마워요. 트랑

 

  노래가 끝나고 트랑의 드리블로 시합이 이어졌다. 트랑의 두 눈은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처럼 번뜩거린다. 하이에나와 사자의 싸움이랄까. 트랑은 최대리에게 패스를 하고는 링 위쪽을 가리킨다. 높게 공을 띄워 달라는 게다. 트랑은 흑표범이 된 듯 상대코트로 달려 나간다. 최대리는 링 위쪽으로 높이 공을 띄운다. 모두의 시선이 공의 궤도를 따라간다. 공은 골대를 벗어나 코트 밖에 불시착할 것이 분명하다. 모두 그렇게 예상하고 있을 때. 트랑이 대지를 박차고 뛰어오른다. 허공의 공을 붙잡는다. 쾅! 그대로 공을 골대 속으로 박아 넣는다. 아리우프! 그 유명한 아리우프라는 것이었다. 원근감이 사라진 트랑에게는 덩크만이 유일한 득점법이었고, 동시에 최고의 무기였다.

 

-배리 굿!

 

트랑은 최대리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찡긋 윙크했다. 최대리의 패스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트랑은 정말 훌륭한 프로선수였다. 더불어 인간으로서도 트랑은 프로였다. 트랑이 선택한 강함은 어떤 것일까.

 

  이과장은 트랑의 멋진 플레이에 잔뜩 골이 나있었다. 이과장은 명우에게 패스를 재촉해 받아 곧장 최대리편 코트로 달려온다. 척! 트랑이 가로 막는다. 시합에 집중하기 시작한 트랑의 두 눈은 빛났고, 그 의지는 트랑의 몸집을 산처럼 크게 부풀려 놓았다.

 

-이... 이 깜둥이 새끼.

 

이과장은 이를 갈며 트랑을 노려보았지만, 검은 산이 된 트랑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별 수 없이 이과장은 민진에게 패스를 하기 위해 팔을 뻗는다. 트랑의 동공이 팽창한다. 공은 어느새 트랑의 손에 있고, 앞으로 달려간 트랑은 창공을 나는 매처럼 뛰어오른다. 쾅! 슬램덩크가 작렬한다. 골대가 삐걱삐걱 신음하며 흔들렸다. 대지가 울리듯 원시적 힘이 느껴졌다. 최대리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고 있었다.

 

  트랑의 폭발적인 활약으로 점수는 90:86. 어느덧 시합 종료 1분여를 남겨두고 있었다. 트랑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후반에 참가한 이과장만은 예외였다. 공격은 이과장 쪽.

 

- 이번으로 시합은 끝이라네 허허. 깜둥이가 힘 좀 썼는데, 어디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가. 다 기회를 자알 살펴서. 빽 좀 쓰고 수단 방법 안 가리면 성공하는 거지 뭐, 안 그래들? 달동네에서 태어난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성실, 정정당당, 사랑, 꿈? 그딴 것들 개나 갖다 줘. 허긴 요즘에 개도 그런 걸 먹을까나? 허허허. 그런 걸 찾으면 아무 것도 안 되는 세상야. 있는 놈들은 절대 자기들이 쥔 걸 놓지 않아. 그러면 어떻게든 빼앗는 수밖에 없는 거야. 밟고 올라가야 하는 거야. 그리고 말야, 최대리. 이 사회란 곳에선 사소한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최대리는 고개를 숙였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 않은가. 이과장은 녹초가 된 트랑을 재치고 골대로 달려왔다. 하하하하. 이과장의 웃음소리가 도플러효과가 되어 점점 커졌다. 텅!

 

-아저씨 수비 안하고 뭐해요!

 

준이었다. 준이 멍하니 서있는 최대리를 대신해 몸으로 제 삼촌을 막은 것이었다. 바닥에 넘어진 준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이과장은 깜짝 놀라며, 주머니서 허둥지둥 휴지를 꺼내 준의 코를 막았다. 이과장의 지시로 민진이 준을 부축해서 코트 밖으로 나갔다.

 

-그래, 내 조카를 방패로 삼을 생각이었나. 안됐군 그래.

 

최대리는 어쩐지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디펜스 파울이었기에, 이과장은 자유투를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도 조카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남은 시간은 40초쯤. 90:86. 모래코트의 유성과 트랑. 하얀 하이에나와 명우. 2대 2의 대결. 




7. 쓰리포인트 슛



  최대리의 드리블로 시합이 속행되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최대리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저기 트랑씨. 시합 중에 미안한데, 강해진다는 게 뭐라고 생각해요?

 

최대리는 심장박동에 맞춰 공을 튀기며 물었다. 트랑이 싱긋 웃었다.

 

-즐거워지는 거시오.

-아...

-이제, 그만 신나게 해봐요. '모래코트의 유성' 지누씨.

 

트랑이 아프리카의 바람처럼 말했다. 진우의 가슴에 화락 불길이 번진다. 진우는 유성처럼 달려간다. 명우를 스핀무브로 제치고, 민진의 가랑이 사이로 공을 뺀 후 다시 잡는다. 하얀 하이에나. 진우는 물러서지 않고 달란다. 재빠른 스피드로 하이에나마저 제치려는데 하이에나가 발을 건다. 앞으로 넘어진다. 시선을 뒤쪽으로. 검은 그림자. 진우는 망설임 없이 그림자에게로 공을 던진다. 트랑이 높이 솟아오른다. 쾅! 철썩! 트랑의 슬램덩크가 한 번 더 작렬한다. 90:88. 좋아할 틈도 없이, 하얀 하이에나는 공을 잡고 골대로 달린다. 트랑은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는다. 하하하하. 이번엔 소리가 작아진다. 진우는 주먹을 콱 움켜쥐고 일어선다. 이과장의 뒤를 쫓는다.

 

'나는 모래코트의 유성이다!'

 

이과장이 레이업을 하려고 튀어 오름과 동시에 진우도 튀어 오른다. 이과장보다 더 높이. 더 높이! 진우 역시 창공을 나는 매가 된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공을 낚아챈다. 드리블. 트랑이 일어선다. 패스. 명우가 가로막는다. 이과장이 카운트를 세며 달려온다. 십, 구, 팔, 칠. 트랑이 진우에게 다시 패스. 가로막는 하얀 하이에나.

 

-짤리기 싫지?

 

산마루로 붉은 해가 진다. 육. 그 빛은 인디언 전사의 얼굴처럼, 사랑을 느끼는 뜨거운 피처럼, 꿈꾸는 심장처럼 붉고 붉다. 오. 진우는 무릎을 깊숙이 굽히고, 가만히 공을 이마 위로 옮긴다. 사. 진우는 도약하는 새처럼 뛰어 오른다. 삼. 붉은 숨을 들이키며 곧고 부드럽게 스냅. 이. 공은 허공에 무지개 같은 포물선을 그린다. 일. 쓰리포인트 슛, 진우는 붉은 석양을 향해 주먹을 꽉 움켜쥔다. 제로. 철썩!

 

90:91. 삐리리리리~ 삐리리리리. 버저비터다.

 

  휴대폰 알람 소리와 함께 시합은 진우의 역전 3점 슛으로 진우와 김, 트랑의 승리로 끝난다. 철썩. 진우와 트랑은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서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 그들은 친구였다. 해는 산마루로 뉘엿뉘엿 져가고, 대지에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쉼과 정화의 시간. 이과장은 넋을 잃고, 빈 그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쉬이 패배가 실감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트랑이 다가갔다.

 

-오우, 오늘 재미써써요. 아저씨 졍말 잘해써요.

 

그때서야 이과장은 정신을 차리고, 트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트랑이 백치처럼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과장은 트랑의 눈을 노려봤다. 그러다 준이 쪽을 흘깃 본다. 준이 고개를 까딱했다. 이과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맞잡았다.

 

-자네도 프로선수 같았네 그래. 허허.

 

진우와 아이들이 다행이라는 듯 동시에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최진우씨.

 

웬일인지 이과장이 진우를 정중하게 불렀다.

 

-네.

 

진우도 정중하게 대답했다.

 

-오늘 수고했어요. 하지만 우리의 승부는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요즘의 삶은 순간순간이 승부와 같아요. 패배하는 자는 곧 도태됩니다. 오늘은 한 발짝 퇴보하지만 다음은 다시 다가설 겁니다. 자, 정중한 태도는 여기까집니다. 흠흠 최대리, 내일 회사서 보세. 각오하는 게 좋아!

진우는 변함없이 승부에 연연하는 이과장의 마음에 동조할 수 없었지만 품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모래코트의 유성과 하얀 하이에나. 두 사람은 라이벌이 된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악수를 했다. 따뜻한 느낌. 어떤 생명에게나 온기는 있는 것이었다.

-오늘 잘 놀았죠?

 

민진이 진우에게 물었다. 민진은 결국 천진한 중학생 아이였다.

 

-그래, 잘 놀았다. 하하.

-오우 저도 잘 노랐어요.

-노랗다고요?

 

명우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모두들 한바탕 크게 웃었다. 싱그러운 웃음이 하늘로 올라가 다시 한 번 환한 해가 뜰 듯 했다. 다시 뜨는 해는 오늘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일까. 진우는 생각했다.

 

-그럼 이만 헤어져야겠네. 그래들. 밥이라도 한 끼 했으면 좋겠지만, 내가 약속이 있어서 말일세.

-아, 잠깐만요.

 

준이가 살며시 진우에게 다가와 삼촌한테는 잘 말해줄 테니 걱정마라고 한다. 진우는 살풋  웃었다. 아이의 햇빛 같은 고마운 마음. 진우의 가슴이 조금은 더 따스해진 것 같았다.이과장과 아이들이 터벅터벅 도로변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은 중간에 멈춰 서서 꾸벅 인사를 하더니, 큰 소리로 뭐라 외친다. 잘 안 들리지만 '고마워요 라던가 즐거웠어요' 같다. 진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아이들을 향해 크게 휘저었다. 트랑도 따라했다. 아이들도 따라했다. 앞서가던 이과장도 뒤돌아서는 듯 하더니, 그냥 홀로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종종걸음으로 이과장의 뒤를 따랐다. 곧 이과장과 아이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우와 트랑은 서로를 바라보며 햇살처럼 미소 지었다.

 

-우석씨는 어떠케 돼쓸까요?

 

트랑이 진우에게 김의 안부를 물었다. 진우는 철봉에 걸어놓은 외투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어?

-왜요?

 

진우의 휴대폰에는 ‘김과장’ 이란 이름으로 다섯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최진우 대리의 머리 속으로 ‘그럼 요번 주 일요일 오후 3시에 만나면 좋겠군요’ 라는 거래처 김과장의 대사가 스쳐 지났다. 삐리리리리. 최진우 대리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네네. 00기업 최진우 대립니다.

-하하. 뭐냐 그 사무적인 대사는. 쿡쿡.

 

김이었다.

 

-집사람 이제 고비는 넘긴 것 같아. 걱정했지 다들?

-아니 뭐 별로. 다행이네 그래.

 

최진우 대리는 약간 안심했다. 김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왠지 지금의 기분이 연기처럼 허공으로 사라질 것 같았다. 최진우 대리는 트랑에게 작은 목소리로 우석이에요 라고 말하며

 

-야, 근데 그보다 다음 시합은 언제냐, 우석아?

-에?

 

최진우 대리는 트랑을 보며 풋 하고 웃었다. 트랑도 피식 웃었다. 휴대폰에서는 ‘하하하하’ 하는 우석의 웃음소리가 흥겨운 음악마냥 새어나왔다.

 

-하하하, 그래 내가 한 번 또 영계들로 물색해보지. 쿡쿡. 야, 근데 여기 병원에 농구잡지가 있길래 잠깐 봤는데 스포츠의 어원이 뭔지 알겠냐?

-글쎄...

-데스뽀르떼. 뛰어놀다.

 

밤하늘의 별빛이 강 물결에 천진하게 뛰어들고 있었다.

 

‘아, 삶의 쓰리포인트 슛을 넣는 것은 언제쯤일까?’

 

최진우 대리는 마음의 방향키를 조금 돌려본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2003. 4.2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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