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아예 잔디밭 위에 드러누워 귤빛으로 물든 구름을 바라보는 남자친구를 내려다본다. 결국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더이상의 로맨스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생일 선물을 매번 잘못 사오는 남편과 살게 된다. 그는 결혼기념일을 잘못 기억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완전히 잊어버리고는 되려 그런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자신과 결혼했냐고 호통을 쳐서 나를 울린다. 그날 나는 온 마음이 흠뻑 젖도록 종일 울 것이고, 그로써 그에 대한 마지막 제례가 끝날 것이다. 아무런 기대감이 없는 날들이 시작될 것이고, 빨래를 널다가 허리께를 두드리며 몸 안에서 들려오는 텅빈 소리를 듣게 된다. 설거지나 마른 빨래를 정리하는 일따위로 생색을 내는 남자를 목도하게 될 것이고, 아이가 생긴 뒤에는 일을 계속해야 ..
나는 혼란에 휩싸여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무표정이 되고 말았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예상 범위 내의 일이라는 얼굴로 유유히 거실 쪽으로 걸어가 소파에 걸터 앉았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소파 앞 티테이블에 모자를 내려놓고 리모컨을 들어 음악을 켰다. 몇 시간 전까지 내가 듣고 있던 드뷔시의 ‘이미지’가 다시 시작된다. 나는 그때까지도 얼이 빠진 상태로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서있었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마치가 이곳이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행동했다. - 사실, 그의 집이었지만. - 거의 물이라도 한 잔 달라고도 말을 꺼낼 기세였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행동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네요. 결국은 계획이 실패하고..
그날의 일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중절모를 혐오하는 여자 중의 한 명으로 살아가고 있다. 생일선물을 잘못 사오는 남자, 그러니까 지금의 남편 역시 처음에는 혐오의 대상 중 하나였다. 그는 중절모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좋지만 딱 두 가지 결점이 있어, 하나는 나이가 상당히 연상, 두 번째는 건망증이라는 소개를 지인에게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그가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생일선물을 잘못 사오는 남자이며, 중절모까지 쓰고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모 관광호텔 카페의 소개팅 - 이라고 쓰고 맞선이라고 읽는 게 정확 -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멀리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곧바로 발길을 돌려 호텔을 나가려고 했었다. 주선자가 레슬링 기술까지..
다음날 카페에 출근했을 때도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3번 테이블에 앉아 전면 책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근심을 알지 못했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위에 쓴 단 세 가지. 그는 항상 테이블 위에 모자를 내려놓곤 했다. 그 모자가 놓이는 곳은 늘 3번 테이블 위였고, 그는 언제나 전면 책장만을 바라보다가 주문한 음료가 바닥을 보이면 카페를 떠났다. 음료는 오직 볼리비아 커피만을 주문했다. 그를 위해서 특별히 볼리비아 원두를 상시 구비해두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책장을 바라볼 뿐 단 한 번도 책장에서 책을 꺼내 펼쳐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 아르바이트생 사이에는 거대한 전면 책장을 가지고 싶어하는 가난한 작가 정도가 그의 정체가 아닐까 하는 가정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나는 어..
나는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살며시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했다. 이건 진짜다. 그런 결론에 이르렀을 때 가장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이 된 순간의 감각이 느껴졌다. 가령 아끼는 사기컵을 떨어뜨렸는데 무심코 발등으로 받아낸 것 같은 그런 느낌.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는 내 눈 앞에 이런 형태로 놓여 있었다. “음… 글쎄요. 당신의 말을 제가 95% 정도 신뢰한다고 쳐도… 미심쩍은 건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세계는 제가 이전에 살던 세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것 같은데요?” “당신이 이쪽으로 건너올 때 당신의 모든 기억들도 리뉴얼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죠. 그건 아주 미세한 작용입니다. 성냥..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깔끔하게 무시당하는 일쯤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니다. 허나 기대가 컸던 만큼 허탈감도 컸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라면 반드시 응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나는 또 다시 동네 꼬마들을 유혹하러 다니는 수밖에 없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 옆에 레모네이드를 내려놓고 조리대로 돌아올 때까지도 사실 기대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다. 조리대로 설거지 해야할 접시들의 산을 보는 순간, 비로소 현실감이 돌아온다. 마치 3년 이상 만나던 남자에게 실연 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유리벽을 바라보며 레모네이드를 금세 다 마셔버리더니 곧 카페를 떠난다. 그가 앉았던 테이블을 행주로 닦으며 조금 눈물을 모집한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내 생일선물을 잘못 사오거나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 오늘도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3번 테이블에 앉아 거리로 난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의 근심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위에 쓴 단 세 가지. 그는 항상 테이블 위에 모자를 내려놓는다. 그 모자가 놓이는 곳은 늘 3번 테이블 위다. 그는 언제나 유리벽 너머만을 바라보다가 주문한 음료가 바닥을 보이면 카페를 떠난다. 음료는 커피를 제외한 모든 음료로, 랜덤이다. 나는 3개월 전 그를 처음 보았지만 먼저 이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일하던 선임은 그보다 3개월 전에 그를 처음 보았다고 했고, 그의 선임은 또 그보다 3개월 이르게 그를 목격했다. 그의 모자는 검은색의 무늬가 없는 중절모로 늘 같은 제품이었다. 모자를 쓰고 있을 때..
겨울바다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1 다희는 천천히 게시판을 훑어보았다. 합격자 명단에서 제 이름을 찾는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다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킨다. 아래위로 옴작거리던 눈동자가 어느 한 점에서 멈춘다. 없어. 다희는 자기를 지탱해주던 실날 같은 희망이 툭 끊어짐을 느꼈다. 어디선가 함성이 터져 나와 상기된 다희의 귓전을 때린다. 다희는 긴장이 풀려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그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칫 이까짓 삼류대 붙은 게 뭐가 좋다구. 다희는 수험번호가 적힌 종이를 바람결에 구겨 보내고, 두꺼운 코트를 비집고 들어오는 한기를 물리치기 위해 몸을 잔뜩 옹그렸다. 집으로 향하는 좁다란 오르막길은 저녁 어스름에 묻혀 오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떻게 됐니, 붙었어? 낡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