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 하는 거 이제 지긋지긋해! 여인 1이 여인 2를 향해 외쳤다. 까페에 앉은 사람 중 누구라도 그녀들이 앉은 자리를 돌아봤을 법한 크기의 목소리였다. 다만, 지금은 그녀들 외에는 나밖에 손님이 없었다. 아무튼 한 번 자기 이야기를 들어봐달라는 신호인 것 같아서 귀를 기울였다. 특별히 읽고 있는 신인작가의 소설이 실례가 되기에 두 손 두 발을 못 드는 게 원통할 정도로 재미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아, 그런데 두 손 두 발을 다 들며 상당히 꼴불견인 상태가 되기는 하겠다. 정확히 말해 내 몸매는 팬더과가 아니라 사마귀에 가깝기 때문에 그 광경은 더욱 참혹할 것이 틀림 없었다. 여인들의 대화는 빠르게 이어졌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누군데?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쓰리포인트 슛 (Three Point Shoot) 1.시합은 무슨 시합이냐, 인생 자체가 시합인데 또 시합을 해? 무더운 여름이었다. 길가다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더위사냥을 사먹는 것만으로 무한한 희열을 느낄 것만 같은 여름. 따르릉. 전화가 왔다. 최대리는 부스스 눈을 떴다. 방안에 엷은 햇살이 퍼져 있었다. 일요일인지라 좀 더 푹 자고 싶었던 그는 조금 짜증을 느끼며 수화기를 들었다. -야 나야 아직 자냐. 이런 굼벵이 같은 놈. 야, 나와라. 오늘 한 판 뜨자 최대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농구에 환장한 놈, 몇 시냐 지금이! 최대리는 수화기를 내던져 버렸다. 머리가 띵했다. 어제 회식자리에서 마신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속 편히 농구 따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일까지 처..
섬집 아이 통영에서도 또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하는 조그만 섬. 선착장에서도 한참을 에돌아 들어와야 하는 곳에 먼 타지서 상처와 그리움만을 안고 흘러와 사는 이들이 있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빚쟁이들을 피해 숨어든 사람, 어떤 수를 써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미혼모들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영감을 가진 가난한 시인도 있었다. 대부분 섬 가운데 오똑 솟은 산의 산비탈에 조그만 밭을 일구고, 틈틈이 바다로 나가 낚시질을 해서 살아갔다. 아이가 있는 집은 대부분 아이 혼자 집을 보는 경우가 많아서, 밖에서 아이들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모의 서글픈 사연의 숨소리와 공백한 바닷소리를 듣고 자라는 아이들은 일찍 외로움을 배웠다. 아이들은 외로우면 어머니로부터 배운 '섬집..
물망초 프롤로그 푸르던 잎사귀들은 어느새 붉은 빛으로 물들고, 외로운 영혼들은 바람에 휩싸인 채 떨어져 내립니다. 하늘은 내가 거니는 땅과 별개인 것을 자랑하듯 저만치 아득히 떨어져, 멀게만 보입니다. 나의 가을날도 어느새 스물 한번 째... 난 온몸을 감싸 도는 싸늘한 옷깃을 여미며, 분분한 낙엽사이를 거닐고 있습니다. 가을이라 그런지 너무 외롭네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즘 자꾸만 기억 속의 작은 그 소녀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맴 돕니다. 저기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나를 보며 미소 짓습니다. 작은 코스모스에 그 소녀의 얼굴이 비칩니다. 나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감돕니다. 그리곤 꿈처럼 달콤하게 내 작은 추억 속으로 나의 기억은 흘러듭니다. 소녀와 나 내일이면 난 엄마 곁을 떠나 수학여행을 가야한다. ..
말해질 수 없는 것 바로 이때다. 해는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잠겼다. 뒷 편의 아파트에서 일제히 형광등이 켜졌지만 해변의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남자는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희미한 윤곽만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이때가 아니면 영원히 기회는 오지 않겠다는 직감. "나 있잖아..." "어 왜?" 여자의 목소리에 바다가 잔뜩 베어 있다. 쏴아 밀려가는 썰물 소리에 말문이 막힌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몰라, 한 10년 됐나." 기억나지 않는 말을 남자는 이어간다. 여자는 남자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일에 관심이 없다. 여자는 무엇에 관심이 있을까...
머리를 자르는 사람 대체 왜 자꾸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거야! 그는 비명을 질렀다. 자고 일어나니 또 머리카락이 자라 있었다. 그의 꿈은 대머리가 되는 것이다. 그는 머리카락이 자라는 게 싫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었다. 그런데도 쉼없이 머리카락은 자랐다. 부처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어, 삶은 고통의 연속이야. 그는 절망하고 절망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으나 20년 동안 기도를 해도 머리카락의 성장이 멈추지 않자 불교로 개종했다) 그가 언제부터 머리카락이 자라는 걸 혐오하기 시작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도 잘 몰랐다. 단지 추측하고 있을 뿐. 아마, 어릴 적에 부모가 이혼했을 때부터였거나, 아니면 가장 좋아하던 장난감을 사촌동생에게 강탈당했을 때, 그것도 아니면 7년간 짝사랑하던 이..
어느 재즈 까페 두 페이지로 구성된 메뉴판을 받았다. ‘잇츠 온리 어 페이퍼 문’이 엘라 피츠제럴드의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글씨로 쓴 메뉴에는 커피 원두 산지의 이름들이 죽 나열되어 있다. 탄자니아, 브라질, 킬리만자로, 코나, 에디오피아, 케냐, 에콰도르, 페루. 어느 곳 하나 가본 적 없는 이국의 이름들이다. 신맛, 쓴맛, 바디감 등의 용어들이 쓰여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분명히 자각되지 않는다. 좋은 걸로 주세요. 그런데 몇 시까지 하죠? 열 두시까지라는 답을 듣는다. 휴대폰 화면을 켜본다. 아홉 시 삼 십 칠 분이다. 이곳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어 거리에 한참 내리고 있을 눈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우 하이 더 문’으로 곡이 바뀌었다. 테이블 앞의 무대에는 무명의..
윌리엄 터너 - Mortlake Terrace 딜리트 (Bye bye Memorial code-etc1) 한 달 전부터 계속 가슴이 아프다. 살아가다 보면 몸 어딘가가 갑자기 아플 때가 있다. 그것은 건강을 좀 신경 써달라는 몸의 SOS다. 구조요청을 받은 사람들은 병원으로 달려가곤 하는데, 병원에서 간혹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 '글쎄요. 몸에 아무런 이상은 없는데...' 건강검진표를 보니 나는 정말 양호한 인간이었다. 나는 병원을 나와 코리아시티의 거리를 걸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플라타너스 입사귀 몇이 죽어서 거리를 나뒹굴었다. 잎 하나가 발에 밟혀 바스러졌다. 파삭. 하는 비명소리. 가슴이 또 아파왔다. 그러나 내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거리를 계속 떠돌았다. 코리아시티를 지나 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