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안 온 날 이 시간이면 그는 항상 전화를 했다. 허나 오늘은 아직이다. 창밖에서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미안하지만 들어올 수는 없다. 가뜩이나 습기가 가득찬 마음에 더 수분을 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를 만나던 때에도 비가 왔었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내 마음도 날씨 같았다. 불을 모두 꺼둔 방은 별빛을 잃은 우주처럼 서늘하다. 똑딱똑딱. 시간을 미는 초침 소리만이 또렷하다. 저 놈의 초침 소리가 시간을 밀고 있는 탓에 내 마음은 더욱 초조하다.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제치고 일어났다. 보이지 않지만 익숙하게 벽시계를 떼어내어 전지를 뽑았다. 그리고 시간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더 이상 누구도 시간을 밀어내지 못했다. 초침 소리가 멈추자 수돗물 소리 같던 빗소리가 갑자기 폭포 소리..
오후만 있던 일요일 내내 비가 온다. 길 위로 엎질러진 네온이 흐른다. 꼭, 밟으면 신발 둘레에 알록달록하니 묻어날 것만 같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거리의 요란한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소리가 볼륨을 줄인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다 꽂는다. 이어폰 줄에 매달려 있는 리모컨을 이용해 음악을 켠다. 들국화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전인권 씨의 슬픔이 끓는 듯한 목소리가 차분한 투로 들려온다. 노래 마디마디에 빗줄기 소리가 새어들어왔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내렸네… 생각없이 걷던 길 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일요일은 늘 오후만 있는 것 같애. 재현이 말했다. 음, 그런가? 재현이 피식 웃었다. 학교 도서실은 여전히 허술하게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익숙하게 문예부 쪽으로..
보노보노를 만났어 나, 보노보노를 만났어. 캐롤 송 ‘라스트 크리스마스’가 흘러나올 무렵이다.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원체 엉뚱한 이야기를 잘 꺼내던 그녀라 대수롭지 않게 흘려 듣는다. 그 비버 말이지? 내가 되묻는다. 비버가 아니라, 해달이잖아. 그녀의 왼쪽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기울어진다. 그랬었나? 그랬었나가 아니잖아, 그런 거야, 애초부터 작가가 그렇게 설정한 거잖아. 그녀에게 그런 기묘한 이유로 일일이 화를 내지 말아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하고 싶지만 참기로 한다. 아무튼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닌가. 그래, 만나서 뭘 했는데.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묻는다. 지금, 뭘 했느냐가 중요해? 그녀는 오늘 밤 나와 대화할 의사가 없는지도 모른다. 뭘 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보노보노를 만났..
結 본 심리 실험은 8월 1일부터 8월 21일까지 약 3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피험자에게 암시를 걸 때 사용한 약품은 귀사의 MC001 프로트타입이다. 피험자의 사체에 대한 부검은 경찰고 협조하여 별도로 진행하지 않기로 했으며, 피험자의 보호자에게는 위자료가 제공되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귀사의 약품이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전시 작전 목적으로 활용할 시 장병들의 사기 진작 및 전장 공포 해소, 외상후 스트레스 발생 억제 등 막대한 전력 상승 효과가 기대된다. 보다 상세한 리포트를 요구한 귀사의 방침에 따라 본 리포트는 소설 형식으로 작성되었으나, 기재된 내용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보증한다. 실험은 대부분 당초 계획한 바대로 원활하게 진행되었으며, 결과 또한..
소년은 꿈에서 의사의 딸을 보았다.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거리에 딸은 서 있었다. 소년은 딸에게 다가갔다. 딸은 멀어졌다. 소년은 다시 다가갔다. 딸은 다시 멀어졌다. 같은 극의 자석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거리를 유지한 채 멈추어 섰다. 검은 허공이 조금씩 조금씩 두 사람을 어디론가 운반해 가고 있었다. 소년은 자기 자신이 원래의 자리에서 지나치게 멀리 와버렸음을 느꼈다. 허나 돌아가야 할 곳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어둠, 어둠, 어둠만이 가득했다. 의사의 딸도 어둠에 묻혀버렸다. 소년은 딸의 생김새를 잊어버렸다.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였던가도 잊었다. 소년에게는 두근거렸던 심장만이, 사랑의 육체만이 남았다. 이내 그것마저도 지워졌다. 소년이 지워졌다...
사람을 이기는 것은 힘들었지만 죽이는 것은 쉬웠다. 사람을 이긴다는 것은 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두 가지 항을 충족시켜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죽이는 것은 오직 지지 않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박 군을 죽이는 일은 너무 간단해서 실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늦은 밤 박 군은 동네 편의점에서 디스 한 갑을 사서 나왔고, 곧 흡연을 위해 인적이 드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는 순간 소년은 그의 뒷목에 과도를 내리 꽂았다. 박 군은 피를 쏟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소년은 그 자리를 벗어나 멀찍이 떨어진 건물의 옥상에서 박 군의 숨이 멎어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거리가 피로 물드는 장면은 붉은 장미꽃이 피어나는 장면과 닮았다. 다행히 휴대폰 전..
本 소년은 나의 진료실에서 눈을 뜨자마자 간호를 하던 딸과 눈이 마주쳤다. 딸은 소년보다 한 살이 어렸고 아름다웠다. 딸은 소년이 생각하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단발 머리모양과 하얀 피부, 붉은 입술, 드러날 듯 말듯 여리게 솟은 가슴. 가는 팔과 다리. 무심한 듯 자상한 성격. 소년은 딸에게 첫 눈에 반했다. 첫 눈에 딸이 자신의 여자임을 알았다. 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딸은 소년에게 물었다. 그 깡패들한테 왜 쫓기고 있었어요? 소년은 침묵했다. 쫓기고 있던 건 맞아요? 답하지 않았다. 저한테 반했어요? 소년은 답할 수 없었다. 딸은 답을 들었다. 딸이 말했다. 이렇게 맞고 다니지 마요. 슬프잖아요. 소년은 다시..
少年의 죽음에 작용한 힘에 관한 硏究 序 소년은 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힘이 있는 다른 소년들은 소년을 괴롭혔다. 소년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차례차례 괴롭힘을 당했다. 우선 소년이 지방에서 수도권 소재의 J 중학교로 전학을 온 첫날의 일이다. 소년이 힘이 없음을, 거기다 심약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간파한 것은 김 군이다. 김 군은 전국 일진 조직에도 가담해 있다는 소문이 도는 학생이다. 소년의 자기 소개가 끝남과 동시에 교사는 서둘러 교실을 빠져 나간다. 이후 발생할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다. 교사는 전학생이 오면 어떤 종류의 신고식을 당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김 군은 소년을 자기 앞에 불러 세웠다. 소년이 순순히 앞으로 나섰다. 소년은 어리둥절할 뿐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