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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란에 휩싸여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무표정이 되고 말았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예상 범위 내의 일이라는 얼굴로 유유히 거실 쪽으로 걸어가 소파에 걸터 앉았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소파 앞 티테이블에 모자를 내려놓고 리모컨을 들어 음악을 켰다. 몇 시간 전까지 내가 듣고 있던 드뷔시의 ‘이미지’가 다시 시작된다. 나는 그때까지도 얼이 빠진 상태로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서있었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마치가 이곳이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행동했다. - 사실, 그의 집이었지만. - 거의 물이라도 한 잔 달라고도 말을 꺼낼 기세였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행동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네요. 결국은 계획이 실패하고 말았어요.”

“계획이라뇨?”

“당신에게 오늘 밤 비밀을 밝힐 계획 말입니다.”

“그거라면 이미 이렇게 멋지게 성공한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명백한 실패예요. 아마 기록부서에 주요 실패 사례로 기록이 될 정도일 겁니다. 성공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거의 10초 정도 앞에 말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보다 당신은 대체 누구고, 나는 지금 어떻게 돼 있는 거죠?”

“아주 간단한 상황입니다. 당신은 저와 배드민턴을 치고 있어요. 그리고 이곳은 당신의 의식 속입니다.”

“네? 대체 그게 무슨…. 제가 기억하기로 당신과 제가 배드민턴을 쳤던 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도 전의 일이잖아요.”

“아니에요. 당신은 아직 저와 배드민턴을 치고 있고, 당신의 의식만 그때로부터 10년을 지나온 겁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원리를 알고 싶어서 물어보시는 건 아니겠죠? 어쨌든 이 여행은 이제 끝났습니다. 당신은 곧 배드민턴을 치던 한강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곳에서의 지난 10년 간의 기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겁니다. 앞으로 5분 뒤에 일어날 일이니 미리 예고를 해드리는 겁니다.”

“아니, 잠깐만요.”

“잠깐만요 라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어요 저로서도. 이건 정해진 약속이고, 이 약속을 어겼다가는 저는 다시는 이 영업을 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좋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거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곳에서 겪은 모든 일들에 대한 기억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면 결국 모두 잊혀집니다. 그러나 단 하나 수 년간 몸에 새겨진 어떤 모종의 인상은 사라지지 않고 원래의 세계에서도 이어집니다. 그 모종의 인상이 무엇이 될지, 긍정적인 것일지, 부정적인 것일지, 우리가 의도했던 것일지, 의도와는 다른 어떤 것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확실한 것이라고 해도 어딘가에서는 맹렬하게 기대를 걸고, 간절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죠.”

“당신이 제게 심으려고 했던 그 모종의 인상이라는 건 대체 뭐죠? 그리고 그건 당신 스스로 꾸민 일인가요?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자, 시간이 됐습니다. 당신을 곁에서 바라보며 지낸 이 10년의 세월이 저는 비교적 유쾌했습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도록 하죠. 당신이 만약 저와의 배드민턴에 대해 끝끝내 떠올리지 못하고 망각했더라면 당신은 아주 행복해지는 비밀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당신의 남편과 함께 앞으로도 수 십 년의 세월을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겁니다. 인간은 때로 굳이 들추지 않아도 될 것을 들춰내서 스스로를 곤란에 빠뜨리곤 하죠. 그리고 그 곤란 속에서 허덕이며 그래도 나는 진실에 가까워져 가고 있으니까 라고 자위합니다. 대체 무엇이 진실인지도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말이죠. 인간은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은 진실에 속한 생물이 아니거든요. 한강으로 돌아가거든 다시 한 번 똑똑히 세상을 살펴보도록 하십쇼. 사람들이 과연 진실한 자신의 의지로, 아니 진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기는 한지. 하하, 당신에게 저주를 거는 건 아닙니다. 불필요한 말까지 하고 말았네요. 의뢰가 있다면 또 당신을 다른 곳에서 다른 형태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그럼 마지막 저주를 걸어볼까요. 어때요? 이건 꿈입니까, 현실입니까, 거짓입니까, 진실입니까. 그럼 안녕.”


해가 저물자 깃털공은 하늘 속으로 붉게 스며들어 가기 시작해 잘 보이지 않는다. 남자친구는 이제 더이상은 못하겠다고 손사레를 치며 잔디밭 위로 풀썩 주저앉는다. 바람이 지나가며 강물을 흔드니, 수면 위로 수 천 개의 꼬마전구가 켜진다. 중절모를 쓴 남자가 혼자서 쓸쓸히 오리배를 저어가고 있다. 어쩐지 오래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2014. 9. 2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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