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조각 도시가 순백의 스튜디오에 놓여 있는 것 같은 날이었다. 그녀는 어젯밤에 그남의 문자를 받았다. 아무래도 너네 집에 두고 온 것 같아. 1년 전에 헤어진 남자였다. 설령 뭘 두고 갔어도 하다못해 도깨비가 주워 갔을 세월이었다. 잃어버린 본인도 모르는 것을 그녀가 알 리가 없었지만, 그녀는 공연히 밤새 집을 뒤져보았다. 그남이 두고 간 것이 끔찍하게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침이 왔고, 평소처럼 뿌연 안개가 세상을 가렸다. 그녀는 그남의 지문조차 발견하지 못했고, 참 다행이라 여겼다. 그녀에게 그남은 남아 있지 않았다. 상쾌했다. 하지만 문득 그녀도 무언가 비어 있다고 느꼈다. 옛날에 즐겨 듣던 노래의 제목을 잊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게 뭐였더라. 그녀는 출근 준비도 하..
그가 다운펌 전도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곧 10여년 전 서촌에 있었던 한 까페를 떠올렸다. 그런 인테리어의 까페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까페의 주인은 어지간히도 꼬끼리에 집착하는 남자였다. 당연히 커피잔과 과자를 담은 접시 등에는 모두 코끼리가 그려져 있는 것까지는 ‘애호’의 수준에서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문의 손잡이가 코끼리 코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은 22세기가 되어서도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을 게 분명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까페의 이름은 ‘그랑블루’였다. - 어째서 코끼리가 아닌가? - 나와 B, 그리고 다운펌 전도사 될 운명에 대해 몰랐던 C는 서로 절친한 대학 동기였다. 나와 B는 줄곧 장학금을 받고 다닐 정도로 학내 성적..
오늘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초여름의 조각을 주웠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왜에 따라 설명해달라고 누가 요청을 한다고 해도 답해줄 수는 없는 그런 과정을 통해 입수했다. 이 '초여름의 조각'이란 것은 참으로 설명하기가 난감한데... 애써서 설명을 해보자면 천천히 달리는 차창에 우연히 회색의 돌담과 그 담을 반쯤 덮은 담쟁이 덩굴이 보이는 순간의 느낌 같은 것이다. 봐라. 애초에 내가 그래서 설명하기가 난감하다고 한 것이다. 블루레이 디스크에 1테라 정도 용량의 햇살을 담아오지 않는 한 충분히 상대에게 초여름의 조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 과감하게 초여름의 조각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하자. 우리는 방금 전에 초여름의 조각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물..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 경북콘텐츠진흥원 편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 1923년 9월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들의 아나키즘 운동 단체인 ‘불령사’의 조직원 김중한을 상해에 보내 폭탄을 밀반입하여, 그 결혼식 장소에 투척할 모의를 했다. 그러나 계획은 뜻대로 실행되지 못했고, 생각에 그친 채로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던 중 8월 말경 갑자기 동경 경시청 경찰들이 불령사 비밀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당시 함께 책을 읽고 있던 박열, 가네코 후미코는 물론 검거 소식을 듣고 모처에 은둔했던 조직원까지 총 16명이 영문도 모른 채 압송되었다. 경찰의 압송 사유는 ‘치안경찰법’ 위반이었다. ‘불령사’가 불온한 모임을 갖고, 일본에 대해 위해를..
그래도 나는 영원히 그대들 편에- 경북콘텐츠진흥원 편 의병장 신돌석 장군 누각에 오른 나그네, 문득 갈 길을 잊고서낙목이 가로누운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남아 27세에 무슨 일을 성취하랴. 잠시 추풍에 비껴 앉아 감회를 느끼네. 신태호, 사람들은 그를 이름 대신 신돌석이라고 칭했다. 세상 천지 어디에나 있는 돌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어서 였을까, 아니면 돌처럼 단단한 사내였기 때문일까. 몰락한 향리 가문에서 태어나 가문을 일으키고자 양반 고을까지 찾아다니며 한문을 수학했던 그는 1896년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일어난 의병 조직, 영덕의진에 가담하여 의성의 김하락 의진과 함께 영해부 공격에 참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그때 돌석의 나이 19세였다. 그..
곁에서 조그맣게 반짝이는 별빛이어도- 경북콘텐츠진흥원 편 율곡의 아우, 옥산 이우 자네, 내 사는 곳 어딘지 묻는다면산 기대어 강물 내려보이는 사립문 닫힌 곳때로 구름 담담히 맑아 모래톱 위에 나서면사립문도 없고 다만 구름만 보이는 곳 君問我家何處住依山臨水掩荊門有時雲淡沙場路不見荊門只見雲 옥산은 안부를 묻는 벗의 서찰을 받고 매학정에 앉아 붓을 들어 답했다. 매학정은 장인 어른이신 고산 황기로 선생께서 지어 사위인 자신에게 물려준 정자로 천혜의 아름다움이 깃든 곳이었다. 옥산은 틈나는대로 이곳에 머물며 옛 시절을 떠올려보거나 담담한 시문들을 지어보고는 했다. 말년에 이와 같은 천운을 누리게 된 것도 돌이켜보면 율곡 형님과 고산 선생 간의 각별한 인연 덕분이었다. 일찍이 아버지(이원수)께서는 을사사화 때 유..
뭔가가 없어 분명히 뭔가가 없다. "뭔가가 뭔가?" 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재치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재치란 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 행복이어서 그걸로는 뭔가가 없다는 기분을 결코 지울 수 없다. 뭔가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돈이 없다. 시간이 없다. 직장이 없다. 일이 없다. 애인이 없다. 잠이 없다. 꽃잠도 없다. 부모가 없고, 친구가 없다. 차비가 없고, 교통편이 없다. 편두통은 있지만 약이 없다. 수 많은 없는 것들 속에서도 뭔가는 없다. 무심코 노래를 불러보았지만 역시 이 속에도 그 뭔가는 없다. 도무지 뭔가를 찾을 방법이 없다. 과연 이 세상에 뭔가를 찾을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곰곰 머리를 이리저리 기울여보지만 역시 답이 없다. 분명한 건 신은 없다. "신발마저 없는가?" 라고..
꽃미남풍의 강아지 꽃미남풍의 강아지였어.남동풍은 아니고?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던지는 말은 모조리 안타를 맞고 튕겨져 나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외야로 날아가버린 ‘꽃미남풍의 강아지’를 쓸쓸히 안고 돌아와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두 팔과 교차로 팔짱을 낀 채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다. 내 도전이 무모한 측면도 분명 있었다. 이런 와중에 대체 꽃미남풍의 강아지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분위기 파악 못하는 장난질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야... 잠깐만 열을 식힐 겸해서 좀 들어봐주면 안 될까, 꽃미남풍의 강아지에 대해서 말이야.뭐?! 그녀는 진심으로 황당해했다. 눈동자 속에는 얼핏 후회의 빛도 어렸다. 대체 뭐 이따위 남자를 사랑한다고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