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계지도를 샀을 때 인간의 뇌에는 변연계라고 하는 것이 있다. 원시뇌인 파충류의 뇌가 짝짓기, 먹기, 잠자기 등 본능을 담당한다면 변연계는 인간의 직관과 감정을 관장한다. 이 변연계는 인간의 몸에서 세계로 뻗어나가 있는 투명한 안테나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인간의 감정과 생각은 1초에도 빛의 속도로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다닌다. 수억 명의 감정과 생각을 우리는 변연계라는 안테나로 늘 수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 순간에도. 내가 세계지도를 샀을 때 그녀 역시 세계지도를 산 일을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쉽게 말하자면 운명, 인연, 기적 따위의 두 음절 단어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조금 복잡하게 사건을 이해하자면 그 순간 나의 변연계와 그녀의 변연계가 ‘세계지도를 방에 걸어야겠어!’라는 ..
- 앨버트 독 - 저녁 7시가 넘으면 불빛은 이곳 리버풀 항에만 남아. 여기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7시면 모두 집으로 돌아와 거실 한 군데만 희만 불빛을 켜두고 각자의 하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나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시간이면 불나방처럼 빛을 좇아 리버풀항으로 가. 떠나는 사람과 돌아올 사람들을 위한 공간. 아주 오래전 아프리카에서 온 검은 사람들은 이 항구에서 영국 각지로 노예가 되어 팔려갔다지. 수백년 전의 그들의 얼굴이 아직 이 항구에 남아 있어. 그곳에 서서 검은 바다를 보면 어쩐지 단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그네들의 얼굴이 떠오르거든. 어쩌면 내 피 속에 나도 모르게 아프리카가 스며들었는지도 몰라. 이곳에서는 기상을 점치는 내기를 할 수 없겠어. 365일 중에 300일 이..
- 여자친구의 여자친구 - 내일은 개학일이다. 얼마전까지 머리 위에서 끝없이 빗방울을 떨구던 구름들이 이제는 아득히 멀리서 떠다니고 있다. 카페오레를 절반쯤 마시고 보니 컵의 벽면을 따라 지저분한 자국이 남는다. 여자친구가 오기로 한 시간이 34분 지나있다. 아니, 아직 28분이다. 커다란 유리창 밖에서 가게들의 불이 켜진다. 더러는 이미 켜져 있거나 혹은 오히려 꺼지고 있다. 무심하거나 유심히 그 모습을 바라본다. 휴대폰 불이 켜진다. 진동 모드 혹은 매너 모드일 것이다. 혹은 둘 다일지도 모른다. ‘미안, 조금 늦었네. 지금 모퉁이야. 신호등만 바뀌면 바로 갈게.’ 모퉁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아니 조금은 신경 쓰인다. 비틀즈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떠오른다.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이다...
- 바닐라 - 한 때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던 강아지 인형이 있었는데, 그 강아지 이름은 아마 바닐라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로 간 걸까. 혹은 언제 간 것일까. 방학이 되어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 하루 종일... 나는 바닐라를 찾고 있다. 10년이나 넘게 잊고 있던 것이 왜 갑자기 이리도 중요해진 것일까 자문해보지만 딱히 답은 없다. 다만 지금은 바닐라의 까맣고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내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을 뿐. 책상 서랍과 옷장 구석구석. 침대 밑. 심지어 찬장 속과 김치 냉장고 안까지 들여다보았으나 바닐라는 없다. 엄마는 내가 아침부터 수선을 피우는 걸 보며 "우리 새끼가 드디어 제 손으로 방 청소를 하네." 라며 대착각 중이어서 바닐라의 행방을 섣불리 물을 수도 없다. 결자해지라는 사자성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