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여자와 넋이 나간 남자를 싣고 오리배는 호수의 중심부를 지나 바람을 따라 지류를 향해 떠가고 있다. 그녀의 눈물이 멈춘다. 정신이 돌아온다. 오리배는 알 수 없는 하류로 자신들을 실어가고 있다. 여기가 어디야?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그남의 정신도 그제야 돌아온다. 그... 글쎄. 어디지. 그녀는 다시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아무튼 물결에 떠내려온 거니까. 반대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원래 장소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이전부터 그남이 지나치게 똑똑한 채 하는 것이 거슬렸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아니다. 그녀는 더듬더듬 어둠 속에서 오리배의 패달을 찾아 밟는다. 그남도 아무 말 없이 패달을 밟는다. 우선, 방향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오리배는 전속력을 다해 하류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
수성못에는 떨어진 별빛 같은 조명들이 촘촘하게 켜져 있다. 그녀가 수성못에 내린 까닭은 그남을 통해 오래전에 죽은 그녀의 두 번째 남자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남자는 대구에서 태어나 강원도 양구에서 생을 마감했다. 군에서는 총기 오발 사고라고 했다. 부대에 배치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첫 야간 GOP 근무를 서던 중 전방에서 들린 동물의 기척을 듣고 깜짝 놀라 자신을 향해 총을 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 근무에 투입되기 전 두번 째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초병 임무쯤은 식은 죽 먹기니까 걱정 말라고 했었다. 그녀가 세 번째 남자를 만날 수 있게 되기까지는 6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6년 뒤 거짓말처럼 그녀는 두 번째 남자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지워버렸고, 당연히 그남에 대해서도 지..
그남은 어두워진 풍경과 자기 옆의 빈 자리를 번갈아 바라본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6번 좌석을 살핀다. 그녀가 없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다른 좌석도 살펴본다. 잠을 자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불쾌한 시선이 날아든다. 그녀는 없다. 다시 자리에 앉는다. 11년이다. 아무리 서로 친한 사이였다고 해도 11년이란 세월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딱히 묻고 싶은 이야기도, 서로 반드시 나눠야할 이야기도 사실 없다. 그때 알고 지내던 그녀 쪽의 사람들의 안부라도 물을까 싶지만, 그들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실례일 것이다. 영화는 삶을 모방하고 삶은 영화를 모방한다. 그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찾아내어 말을 건다면 후자쪽이 될 것이다. 어디선가 보지 않은 삶이란 없다. 서른이 지난 이후 삶의 ..
원 모어 타임, 원 모어 찬스 어? 안녕. 아... 안녕? 둘은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무려 11년만의 만남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남의 자리는 6호실 13번 좌석 창측이었고, 그녀의 자리는 6호실 6번 좌석 복도측이었다. 그남이 13번 좌석으로 향하던 중 그녀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낸 것이다. 그녀는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럼. 응. 그래. 아, 저기... 응? 뒤쪽에서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었으므로 그남은 말을 채 잇지 못한 채 13번 좌석에 가 앉는다. 열차가 출발한다. 그남과 그녀는 어딘가 불편하다. 분명 서로의 옆 자리에는 낯선 타인이 앉아 있는데, 마치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새마을호 열차는 과거에는 가장 빨랐으나, 이제는 느려진 속도로 레일을 달린다...
난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 눈이 달렸어. 그러니까 남들처럼 얼굴에 눈이 달린 게 아니라 정수리의 검은 머리칼 숲 사이에 비밀의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 두 개가 고여 있지. 의사는 어머니에게 자궁향수증후군이라고 했어.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너무 큰 나머지 태어나면서도 어머니의 자궁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눈이 거기에 붙어버린 거라고. 아무래도 좋아. 난 하늘을 보며 걷는 게 무척 좋거든. 하늘은 신기해. 정지해 있는 경우가 없지. 무언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해. 그리고 놀랍도록 아름답지.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라는 시가 유행해서 사람들이 너도 나도 불편하게 목을 뒤로 젖혀야 할 때도 나는 여유롭게 유행에 동참할 수 있었어. 세상에 하늘로 눈이 달린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넌 학교에 갈 수 없다고..
그리움의 풍경 비가 개이고 하늘이 멀어졌다. 잠시 푸른 벌에 널어두었던 흰 빨래를 하나 둘 걷어 다시 내 방 한 켠 가시나무 같은 옷 걸이에 걸어두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빨래를 말리려고 선풍기를 켰다. 여름이 웅웅 울며 제 몸에 남아있던 먼지를 뿜었다. 쓸모없는 기억들, 버려야할 찌꺼기들이 방 안 가득 찼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을씨년스런 가을비의 냄새를 지우려 라디오를 틀어보았다. 치직. 잡음은 몸을 낮춰 방바닥을 흘렀다. 주파수를 살짝 돌리자 곧 익숙한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어느 주파수를 잡던 비슷했다. 창 밖의 멀어진 하늘은 누가 죄다 구름을 걷어 갔는지 시리게 파랬다. 창문을 열었다. 집 근처의 공사장에서 작업하는 소리가 들렸다. 탕탕 위잉. 고단한 소음들. 라디오 속의 가수는 가슴 ..
벚꽃이 지던 밤, 우리는 청계천변을 걸었어 당신의 첫 번째 기억은 뭔가요?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굳이 단도직입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을지는 나 역시 확신이 없지만. 우리는 한 달 후면 오픈할 예정이라는 청계천변에 서서 물길이 흐르는 아래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우리는 영풍문고에서 처음 만났고, 그 전에는 전혀 만나지 않던 사이였으며, 서로의 본명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운영자님이라고 불렀고, 나는 그녀를 줄리아라고 불렀다. 나는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싸이월드 클럽 ‘로망띠끄’의 운영자로 1년째 활동 중이었다. 회원수는 120여명에 달했지만 실제로 글을 쓰는 것은 나뿐이었고, 댓글을 달아주는 것은 그녀 뿐이었다. 불필요한 데이트 ..
우편배달부의 나무 그도 몰래 나무 한 그루가 희붐히 피었다. 나무의 머리카락은 머다래서 올려다보면 먼 우주 별 자리의 신화들이 밤마다 가지에 앉았다. 그의 나무를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다만 그 혼자만이 조그맣게 열린 창으로 나무를 바라보곤 하는 것이다. 여름이어서인지 한 차례 비가 올 때마다 나무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꼭 그가 바라보는 우주를 다 덮어버릴 기세로.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복을 입고 우체국으로 향하는 이였다. 요즘은 이메일이 활성화 된 까닭에 우편업무가 줄긴했지만, 그래도 그가 일하는 곳은 바쁜 편이었다. 그의 일은 편지를 각각의 주소로 배달하는 일이다. 가끔 엉뚱한 주소로 편지가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제 주인을 찾아갔다. 사람들에게는 그 마음 속에 저 마다의 주소가 있어서, 사실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