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남은 문과대 203호 강의실에서 그녀를 만났던 때를 아직도 기억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학과였고, 같은 과목을 신청했으며, 같은 조가 되었고, 공교롭게도 첫날 앉게 된 자리 역시 서로의 옆자리였다. 그남은 그녀를 본 바로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 놀랍게도. 하지만 누구에게 반하기를 잘하는 성향이었던 그남은 그녀 역시 그남이 반한 여자들 중의 하나가 되리라고만 여겼다. 그녀는 그남에게 호감을 가졌으나, 반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누구에게 반하기를 잘하는 성향이 전혀 아니었다. 그남은 친구 관계를 가장해 그녀에게 접근했고,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그남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지 1년만에 두 사람은 절교를 했다. 사실, 절교란는 단어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절교를 할만큼 돈..
이번에도 그남은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몇 번이나 소매 끝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자신의 코를 신뢰할 수 없다는 듯이. 약속 시간을 1분 정도 남겨 놓고 아래 편에서 걸어올라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검정색 코트를 입고 분홍빛 목도리를 입가까지 꽁꽁 맨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반묶음으로 단정하게 묶었다. 꽁지에는 하얀색 큰 리본이 매어져 있었다. 그녀의 큰 눈동자가 내 쪽을 보았다.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크게 흔들었다. 그남도 크게 손을 흔들었다.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남의 마음도 크게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몸 속의 무거운 것들이 일순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와 마주하고 서자 온 몸이 바람에 흩날릴 듯 가벼워졌다. 그남은 가까스로 발을 딛고 섰다. 몇 번을 보아도 감격적이었다...
30 그남은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른 한 송이의 장미 꽃다발과 케이크를 들고 어깨에는 기타를 둘러맨 채였다. 12월의 바람은 매서웠다. 남부터미널 앞은 저녁 중에도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돌아오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그남은 추운 탓에 실내로 들어가려다가도 터미널 실내에 가득한 어묵 냄새 때문에 밖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녀는 음식 냄새가 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가 오기까지는 아직 1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너무 일찍 왔다. 그남은 깜짝 이벤트라도 준비하자 싶어 먼저 예술의 전당쪽으로 걸었다. 오르막길 저편에서 유리조각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거리에는 걷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남은 꿋꿋이 길을 걸었다. 육교를 건너고, 예술의 전당 음악당 앞에 다다랐다..
두 사람은 교회당을 나왔다. 적도의 바람이 끼쳐왔다.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고 나니 두 사람은 어색했다. 라타나 교회당 안에서 있었던 조금 전의 일이 먼 과거의 일처럼 여겨졌다. 여자는 혼란스러웠고, 남자는 허망했다. 좀처럼 누구도 먼저 작별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혹은 꺼내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얼굴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지 못했다. 라에티히의 언덕 아래 감춰진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땅만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정리되거나 해소되지 않았다. 엉켜 있던 실타래는 더욱 엉켜버리고 말았다. 여자는 어찌되었거나 남자의 곁을 떠나자고 마음 먹었다. “익스큐즈미.” 그때, 교회당 문이 열리며 푸른빛 수도복을 입은 수사가 나와 말을 붙였다. 손바닥을 펴 앞으로 내밀었다. 그 위에는 여자의 결혼반지가 놓여 있었다. 남자..
교회당 쪽에서 희미하게 오르간 소리가 들려왔다. 바흐였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정확하게 곡명을 맞추지는 못했다. 커다란 문을 열고 조심스레 발 네 개를 밀어넣었다. 3층 건물 정도 높이의 높다란 천정과 창으로 비끼는 수 십개의 선명한 햇살들, 그리고 제단 쪽에 놓인 오르간에서 울려퍼지는 바흐. 연주자는 금발의 백인 여성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제일 뒤쪽 편의 기다란 교회의자에 앉아 연주를 들었다. 남자는 여자의 귀에 대고 역시 바흐는 교회에서 들어야 한다고 속삭였다. 문을 하나 밀고 들어왔을 뿐인데 남자의 말처럼 전혀 별개의 세계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연주자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커다란 대공간을 가득히 채우는 400여년 전의 멜로디에 몸을 맡겼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여자도 따..
40 “행복하니?” 남자는 여자에게 물었다. “행복해.” 여자가 답했다. 날짜 변경선을 지나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지구 남동쪽 끝에 위치한 뉴질랜드의 북섬, 그 중에서도 오클랜드나 웰링턴이 아닌 라에티히라는 시골마을에서 두 사람이 만날 줄은 몰랐다. 여자와 남자가 나란히 앉은 언덕 뒷편으로는 라타나 교회가 미대 수험생의 정물화처럼 놓여 있었다. 남자는 대뜸 행복에 대해 물어놓고는 말이 없었다. 남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둘이 만나기까지의 자초지종을 나누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친구의 출장에 동행취재 작가라는 명목으로 함께 하는 중이었다. 남자의 여자친구는 유명 출판사의 에디터로 애거사 크리스티와 함께 추리소설의 여제로 꼽히는 나이오 마시의 판권작 출판계약을 위해 ..
남정은 여인 모르게 눈물을 훔치고는 태연한 채를 했다. 사과 껍질이 다 깎여 나가고, 여인은 나룻배 모양으로 사과를 자르기 시작했다. 곱게 빚은 나룻배를 여인은 남정의 입에 넣어주었다. 남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먹었다. 흰 나룻배가 여인의 손에서 남정의 입 사이를 몇 차례 오갔다. 남정은 오래 감춰두었던 욕심이 다시 머리를 내미는 것을 느꼈다. 남정의 눈이 뜨거워졌다. 여인도 그것을 느꼈지만 모른 채했다. “행복하니...?” 불현듯 남정이 물었다. 여인은 답하지 않았다. 계속 사과조각을 집어 남정의 입에 넣을 뿐. “대답해봐, 행복하냐고... 말해도 되잖아 그냥, 행복하다고. 그런 거라고.” 여인이 다시 한 번 사과조각을 집어서 남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인은 사..
50 “오랜만에 퀴즈... 아도니스의 꽃말은?” 여인은 제가 품에 고이 안아 온 화병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하얀 민무늬 도기병에 한 송이 노란꽃이 피어올라온 모양이 단아했다. 병상에 누운 남정은 쉬이 입을 떼지 못하고 ‘음...’이라고 긴 소리를 내며 골똘히 생각했다. “글쎄... 잘 모르겠어.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왔던 미소년이었던 건 알겠는데 말이야. 아프로디테와 페르세포네의 사랑을 동시에 받아 죽고 말았던. 혹시, 꽃말이 아름다운 남자 이런 건가. 나한테 어울리는데?”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남정의 얼굴을 쏘아보며 “으이구. 이제 일어나도 되겠다. 기껏 생각해서 와줬더만. 올 필요도 없었던 거 아냐? 사실은 꾀병이지?” “미안 미안, 농담이야. 그래서 꽃말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