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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은 여인 모르게 눈물을 훔치고는 태연한 채를 했다. 사과 껍질이 다 깎여 나가고, 여인은 나룻배 모양으로 사과를 자르기 시작했다. 곱게 빚은 나룻배를 여인은 남정의 입에 넣어주었다. 남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먹었다. 흰 나룻배가 여인의 손에서 남정의 입 사이를 몇 차례 오갔다. 남정은 오래 감춰두었던 욕심이 다시 머리를 내미는 것을 느꼈다. 남정의 눈이 뜨거워졌다. 여인도 그것을 느꼈지만 모른 채했다.
“행복하니...?”
불현듯 남정이 물었다. 여인은 답하지 않았다. 계속 사과조각을 집어 남정의 입에 넣을 뿐.
“대답해봐, 행복하냐고... 말해도 되잖아 그냥, 행복하다고. 그런 거라고.”
여인이 다시 한 번 사과조각을 집어서 남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인은 사과조각을 내려놓으며 탄식했다.
“행복해... 이제 됐니?”
“모든 게 다 좋아?”
“모든 게 다 좋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여인의 가느다란 눈썹이 일그러졌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여인은 누워 있는 남정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남정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남정의 왼쪽 눈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여인이 손으로 닦았다.
“난 계속 기다렸어.”
남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기다리지 않았어.”
여인의 목소리는 짐짓 단호했다.
“내가 살아나면.. 살아나면 말이야. 다시 시작해줄 수 있어..? 기회를 한 번 더 줄 수 있겠어?”
남정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지 않기를 기다리는 존시처럼 말했다. 여인은 간절한 표정을 한, 죽음 앞에 놓인 늙은 남자의 얼굴을 세세히 살폈다. 이마에 패인 세 가닥의 주름이며, 웃음자국처럼 남은 눈가의 주름, 여전히 오똑한 코, 아직 살아 움직이는 입. 많이 늙었다. 그러나 여인이 동경했던 혹은 사랑했던 깊은 눈동자. 남자의 그 눈동자 속에는 청년시절부터 그가 간직해 온 어떤 생의 열망이 아직도 총기를 잃지 않고 담겨 있었다. 여인은 그 열망의 빛이 온전히 남정의 것이라고 여겼지만, 남정은 그것은 여인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여겼다. 여인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면 남정의 그것도 영영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다.
“말해봐. 다시 시작해줄 수 있냐고! 그럼 나는 죽더라도 다시 살아나 보일 테니까!”
남정의 말은 오히려 죽음을 확신한 사람의 말 같다고 여인은 느꼈다. 순간 거짓이라도 말해줘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허나
“아니.. 우리는 시작한 적이 없어. 이제는 너도 그걸 인정해야해.”
여인은 진심을 택했다. 남정의 눈에서 뜨거움이 걷혔다.
“이만 갈게. 만나서 반가웠어.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었어. 그런 순간들이 내 인생에도 언제나 있기는 했어. 하지만 그건 꼭 사랑은 아니었을 거야.”
여인은 담담하게 허공 속에 말을 놓았다. 말은 잔잔 호수에 표류하는 잎새처럼 허공 속을 떠갔다. 남정이 물었다. 조약돌을 던지듯.
“사랑이 뭔데...?”
여인은 손가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정의 눈동자는 허둥지둥 여인의 얼굴을 좇았다. 여인은 말했다.
“그런 건.. 자기 자신에게서 답을 찾아도 될 나이야. 우린. 내게 묻지 말고 너한테 물어. 모르겠어도 계속 물어봐. 지금 모르겠으면 앞으로도 생각해봐. 그러니 죽지 말고 꼭 살아나. 알았지? 언젠가 니 책에서 그 답을 찾은 걸 보고 싶다. 힘내. 안녕.”
여인은 남정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 남정은 일어설 힘이 나지 않았다. 여인이 깎아놓은 사과 껍질이 아직 접시에 남아 있었다. 나룻배 두 척도 초라한 표정으로 함께 놓여 있었다. 보조창으로 호젓한 바람이 다시 한 번 들었다. 남정은 이불을 끌어당겨 목까지 덮었다. 눈물이 두 눈에서 흘러내렸지만 온전히 서러운 기분만은 아니었다. 묘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봄도 함께 들어 있었다. 생의 모든 순간들이 그러했겠지만.
남정은 간신히 몸을 틀어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여인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눈길 위에 여인의 발자욱이 선명하게 찍혔다. 그 발자욱 자리에서 아도니스 꽃이 피는 환영을 보았다. 영원한 사랑의 행복. 남정은 한 번 더 되뇌었다. 눈물을 아무렇게나 훔쳤다. 살아야겠다. 남정은 나직이 읊조렸다. 살아야겠다고.
2012. 5. 2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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