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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8

멀고느린구름 2012. 5. 26. 23:44




교회당 쪽에서 희미하게 오르간 소리가 들려왔다. 바흐였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정확하게 곡명을 맞추지는 못했다. 커다란 문을 열고 조심스레 발 네 개를 밀어넣었다. 3층 건물 정도 높이의 높다란 천정과 창으로 비끼는 수 십개의 선명한 햇살들, 그리고 제단 쪽에 놓인 오르간에서 울려퍼지는 바흐. 연주자는 금발의 백인 여성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제일 뒤쪽 편의 기다란 교회의자에 앉아 연주를 들었다. 남자는 여자의 귀에 대고 역시 바흐는 교회에서 들어야 한다고 속삭였다. 문을 하나 밀고 들어왔을 뿐인데 남자의 말처럼 전혀 별개의 세계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연주자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커다란 대공간을 가득히 채우는 400여년 전의 멜로디에 몸을 맡겼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여자도 따라해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바로크 시대로 워프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단 앞에서 백발의 가발을 쓰고 검은 연주복을 입은 바흐가 직접 연주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흐는 두 세 곡 정도를 더 앵콜곡으로 연주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당을 나갔다. 나가면서 두 사람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충만함을 느꼈다. 


“다음 연주자는?”


남자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여자쪽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손사레를 쳤다. 


“그럼 내가 해볼까?”


남자는 양손을 깎지를 껴서 앞으로 쭉 뻗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오르간 쪽으로 향했다. 남자의 걸음걸이가 긴장한 것처럼 어딘지 어색했다. 남자는 오르간 의자에 앉아 여자쪽을 향해 물었다.


“신청곡은?”


여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없어.”


라고 말했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신청곡이 없으므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마음대로 공연이 있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남자는 의자에 앉아서 혼자 크게 박수를 쳤다. 여자는 마지 못해 따라한다는 양 박수를 쳤다. 남자가 심호흡을 했다. 건반에 손가락을 올렸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여자는 익숙한 전주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었다. 아. 남자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낮은 목소리가 이국의 교회당 안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더 크게 보이고... 더 높게 보였지... 내가 아닌 마음에.. 난 눈물을 흘리고.. 잡을 순 없었지.. 가까이 있지만.. 숨겨진 네 진실을 난 부를 순 없었지..”


 여자는 곡명을 떠올려냈다. 첫사랑. 전람회의 노래였다. 노래는 점점 클라이막스를 향해 나아갔다. 노래는 저며들고 고조되고 격랑에 휩싸였다가.. 다시 잔잔해지며 오르간의 음들이 하나 하나 선명히 들려왔다. 여전히 좋은 목소리다. 여자는 남자의 목소리를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의 노래가 끝났다. 여자는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남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쪽으로 왔다. 여자가 물었다.


“피아노는 또 언제 배웠어?”

“틈틈이. 그리고 아마도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

“으이구. 니가 그러니까 문단 최대의 바람둥이란 소리를 듣는 거야.”

“진심인데.”

“진심이겠지. 진심으로 바람둥이.”

  

남자는 칭찬을 들은 소년처럼 밝게 웃었다. 여자는 그 웃음이 좋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차라리, 남자가 정말로 바람둥이였다면 좋으련만 싶었던 것이었다.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신문 지면에서, 연예계 정보를 다루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넷을 떠도는 정보들에서 남자가 유명한 누구누구와 열애중이라는 이야기를 접할 때에도 여자는 그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하곤 했던 것이었다. 불편한 믿음이었다. 여자는 문득 남자에게 묻고 싶어졌다. 


“그런데 말이야.”

“응”

“그 여자 연예인이랑 사귀었다는 거.. 사실이야?”

“아아... 그거...”

“응. 그거.”

“어떻게 생각해?”

“뭘?”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구? 사귄 것 같애? 아닌 것 같애?”

“글쎄...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뭐... 나야, 이미 결혼도 했고.”


여자는 이미 결혼도 했고 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는데 라고 후회했다. 남자도 역시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린 듯 잠시 말을 멈췄다. 허나 이내 툭 털어버리고 말을 꺼냈다. 


“아니야. 그쪽이 날 좋아했지만, 난 좋아하지 않았어. 이번에 여행에 같이 온 그 여자 에디터도 마찬가지야. 난 이제 누구도 좋아하지 않아. 연애에도 관심이 없어.”

“거짓말. 사귀는 거 아냐?”

“아냐. 숙소도 따로 잡았어.”


여자는 남자의 말에 안심했다. 하지만 왜 안심을 해야하는지 혼란스러웠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너무 오래 남편과 떨어져 있었다. 남편에게 가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우선, 이 이공간 같은 교회당을 나가자 싶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안심했다는 인상을 남자에게 주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래? 그랬구나. 역시 루머는 믿을 게 못 되네. 우리 이제 그만 나가자. 남편이 아픈데 혼자 너무 오래 뒀어.”


여자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려했지만 덕분에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다급하게 말하고 말았다. 심지어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남자는 빈틈을 파고들었다. 


“나도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기다리는 건지.. 그냥 이렇게 살아가기로 포기해버린 건지..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너의 행복을 빌고 있는 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여자는 남자의 말에 실망했다. 여자가 흔들릴 때마다 남자는 지나치게 진심을 드러내곤 했다. 여자는 남자의 그런 점을 영영 신뢰할 수 없었다. 덕분에 다시 한 번 분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복잡하던 머릿속도 정돈이 되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말야. 이런 여행에 같이 와주는 게 아니야. 너의 모호함이 모든 여자들을 상처 입히는 거야. 아직까지 넌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네가 정말 잘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네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말야. 정답을 말하는 게 아냐. 사는 데 정답이 어디 있겠어. 단지 너의 답이야. 너만의 답 같은 것 말이야. 그런 걸 정해봐. 그리고 분명하게 그 답을 믿고 살아봐!”


  여자는 힘차게 말해놓고 오히려 속으로는 당황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그런 의문이 들었던 것이었다. 남자는 잠자코 듣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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