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저고리. 박창돈 61년 인터뷰 61년 전에 한 남자애를 만났고 마음에 품었지요.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3년 간 동거를 하던 연인과 이별하고 다니던 잡지사에 장기 휴가서를 내고 2주 째 집에 틀어박혀 있던 때였다. 부장은 최후 통첩을 했다. 이번 인터뷰를 따오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것이었다. 퇴직 당한다고 해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매일 매일 무작정 버스를 타고 처음 보는 동네에 내려 배회하다가 동네 약국에 들러 수면제를 사오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수면제는 제법 치사량에 가깝게 모여 있던 참이었다. 부장은 내 의사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메일로 인터뷰이의 신상 명세서를 보내왔다.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이 가득한 노파의 사진을 보자마자 다음 내용은 읽지도 않고 컴퓨터를 꺼버렸었다. 자..
0 소년은 대학에 진학하며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왔다. 소년이 청년이 되어 서울에 머무는 동안 고향 집에서는 소년의 물건을 정리하다가 그만 소년이 소녀의 얼굴을 그려놓은 수첩을 버리고 말았다. 소년은 영영 소녀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만, 그 가슴 한 켠에 가장 아름다웠던 한 여자아이의 느낌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때 문학기행에서 돌아온 소년이 전해준 소녀의 이미지가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어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소년이 부산을 떠난 후에도 나는 부산에 남았다. 혼자 바닷가를 거닐 때면 늘 소년과 소년이 그려왔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했다. 소년이 품은 소녀는 내 가슴 속에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소녀는 다른 이들의 가슴에도 이름을 달리하며 담겨 ..
흰색 블라우스에 파란색 스웨터를 덧입은 소녀가 앉은 소년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녀 쪽에서 소년 쪽으로 실바람이 불어왔다. 메밀꽃 내음이 훅 끼쳤다. 흡사 그 내음이 소녀에게서 오기라도 한 듯이 소년의 가슴이 뛰었다. 소녀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깨끗하고 조그만 얼굴이었다. 걸려 있던 달이 떨어져 오기라도 한 듯이. 소녀는 소년의 대답을 기다리고 섰다. 소년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맞을 거에요. 음... 아마도. 그렇겠죠?” “하하, 그게 뭐에요. 좀 더 확실하게 대답할 수는 없어요?” “아, 그러게요. 음.. 제가 알기로는 분명히 맞아요.” “으음.”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웃음을 참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소년은 기분이 상해버렸다. 바위에서 일어나 이효석 생가 쪽으로 걸음을..
10 봉평으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에서 소년은 설레고 있었다. 가슴이 7월의 바다처럼 파도질을 했다. 부산시에서 주최한 청소년 권장도서 독후감 공모전에서 소년은 최우수상을 받았다. 소년은 알베르 까뮈의 에 대해서 썼다. 태양이 뜨거워서 사람을 죽인 뫼르소는 휘황찬란한 문명의 네온사인에 지친 인류의 권태를 대변한다고 써서 심사위원의 구미를 맞췄다. 그러나 소년은 을 단 한 줄도 읽어본 일이 없었다. 소년이 읽은 것은 낡은 다락방에 있던 세계대백과사전 12편에 있던 작가 소개와 의 줄거리 요약이었다. 소년은 어릴 적부터 거짓말에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타고난 연기력도 갖추었다. 언젠가부터 소년은 자신이 타인을 속이고 있다는 것마저 망각하며 상대를 속이곤 했다. 소년은 알게 되었다. 타인을 속이기 위해서는 먼..
그남은 대답했다. “첫눈에 반해서요.” 그녀의 질문을 숫제 그쪽은 왜 저를 좋아하세요? 라고 받아들인 것만 같은 답이었다. “와.. 좋네요. 그 대답. 기억해둘게요. 그쪽의 사랑이 어디에까지 이르는지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골목길을 따라 사라졌다. 가벼운 걸음이었다. 어쩐지 고백을 해버린 것 같아 뒤를 따라가기도 어색해 그남은 자리에 머물렀다. 다음날 학교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그남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지난 날 하나의 질문으로 그남의 모든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그남은 싫지 않았다. 공강 시간마다 그녀와 그남은 중앙 운동장 비탈에 있는 잔디밭에서 만나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과 동경하는 작가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하..
20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녀는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그남이 아닌 그남의 학과 선배에게. 올 봄 지방지의 신춘문예로 등단한 선배였다. 키는 보통. 얼굴은 훈남과. 유행과는 상관없이 무태 안경을 고수하는 이였다. 남자로서의 매력은 덜했지만 글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와 결합했을 때는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었다. 이제 갓 입학한 1학년 새내기였던 그남은 그녀에게 소설가가 되는 방법따위를 일러줄 수 있는 위치가 되지 못했다. 한 발짝 물러서서 고작 스물 세살에 불과했지만 등단 선배의 말을 잠자코 듣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써. 그리고 많이 써. 그런 다음에 많이 버려. 그러면 돼. 그게 다야.” “그렇죠... 그런데 그게 어려워요. 제일 어려운 일 같아요.” 그남은 마음 속으로 선배의..
그남은 품 속에서 조그만 선물상자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단번에 반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크기였다. 그녀는 주저하면서 힙겹게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녀의 얼굴로 갖가지 표정이 교차했다. 포장을 벗기자 벨벳으로 감싸인 반지 상자가 나왔다. 덮개를 열었다. 그녀는 어떤 결심을 한 듯 담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 껴볼까?” “응. 내가 해줄게.” “아냐, 내가 낄래.”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오른쪽 약지에 은빛 반지를 걸어넣었다. 어째서 오른쪽인가 하는 의문이 그남의 얼굴에 나타났다. “아직 네 맘을 받아들이기로 확정한 건 아니니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남의 마음을 읽어 말했다. 그남은 머리를 끄덕였다. “예쁘다... 고마워 정말.” “잘 어울린다. 다음에는 다이아 반지로 해줄게.” “언..
그남은 그녀의 눈 앞에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그남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뭐야 이거..?” “뭐긴. 크리스마스 선물이지.” “하하. 뭐야~” 그녀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남은 어깨를 짓누르던 중력이 사라져버린 것 같이 느꼈다. “그리고 이것도~” 그남이 케이크를 내밀었다. 딸기 케이크였다. 며칠 전 그남이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케이크라면 역시 딸기 케이크가 정석이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기뻤다. 심장의 무게가 더해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오늘은 더 생각하지 않기로 정했다. 그남이 포장에서 촛불을 꺼냈다. “설마 잔인하게 나이 개수만큼 촛불을 꽂는 건 아니겠지?” 그녀의 말에 그남은 움찔하며 촛불을 도로 포장 안으로 밀어넣었다. 머쓱한 웃음. 헛기침. 그리고 그남의 생일 축하 노래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