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물어도 되나...?” 노옹이 폭포수 소리에 묻힐듯 말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파는 가까스로 말 뜻을 알아챘다. “뭘?” “아까 네가 물어본 거. 여기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노파는 말끝을 흐렸다. 노옹은 노파의 사정을 짐짓 짐작하고 있었지만 선뜻 물어보긴 곤란한 눈치였다. 한동안 말성이던 노옹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다시 말을 시작했다. “얘기 들었어... 사별했다며..” “사별은 무슨... 이 나이 즈음이면 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해...” 그러고는 노파는 얼마간 생각에 잠기어 있더니 다시 천천히 입을 떼며 “자연이란 평온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저 고요가 무섭기도 한 거야 그렇지...?” 하고 계곡의 신령에게 묻기라도 하듯이 넋을 잃고 폭포수 쪽을 ..
60 박수기정은 제주 올레길 9코스의 시작점이었다. 박수는 제주도 사투리로 물을 마시는 바가지이고, 기정은 절벽이라 했다. 병풍처럼 펼쳐진 기다란 바위절벽 위에 샘이 있어서 그리 이름지었다고 들었다. 올레길 코스 가운데 그나마 가장 짧은 코스라고 해서 선택했지만 처음부터 오르막이었다. 노파는 다소 후회하면서도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좁다란 숲 길을 지나 박수기정 정상 부근에 다다르니 넓다란 길이 나왔다. 관광객들을 위해 닦아놓은 길이었다. 노파의 이마에는 벌써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숨도 가빠왔다. 노파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자기의 주름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이제는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았다. 벤치에 앉아 구름 한 점 없는 여름하늘을 올려다 보며 상념에 빠..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라고 말을 건내며 노파는 한 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긴다. 노옹은 자신 앞에서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가락으로 두 눈을 세차게 비빈다. 현기증도 인다. 아직 정신은 흐려지지 않았다. 노옹은 다시 눈 앞에 선 노파의 얼굴을 확인한다. 주름 골이 깊이 파여 세월의 흔적이 선연하지만 여전히 오래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반달 같은 이마, 바람이 스친 자국처럼 가느다란 눈썹, 깊은 우물을 닮은 눈, 고운 곡선을 그리는 코, 동화 속 소녀마냥 옅고 얇은 입술. 이런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고 노옹은 생각한다. 노파는 노옹이 앉아 있던 벤치에 내려앉았다. 노옹은 일어선 채다. “뭐해? 앉아요. 헛것 보는 거 아냐.” 노파가 어린아이처럼 ..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70 노옹은 요양원 뒤쪽으로 난 기다란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을 걷고 있다. 오늘은 정신이 맑다. 장대비가 내린 뒤라 숲의 모든 생명들이 한껏 기지개를 켜며, 생의 냄새를 퍼뜨리고 있다. 노옹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원없이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오늘이 자기 삶의 마지막 하루이길 바랐다. 노옹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친인척도 없었으며, 입양한 자식도 있지 않았다. 그 모두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포플러나무 숲 사이를 혼자 거니는 것처럼 노옹은 인생의 길을 혼자 걸어왔다. 치매에 걸리기 이전까지 그는 유명한 작가이자, 총명한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처음 요양원에 입원한 몇 년간은 대학생이며, 독자며, 지인이며 하는 이들이 드나들었다. 허나 정신이 나갔을 때 부리는 노옹의 고집..
16.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개 대담회 에 대한 국민적, 아니 세계적 관심은 엄청난 것이었다. 동시간대 시청률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을 끌어내리고 시청률 1위에 올라선 것은 물론, 그 수치는 38.1%라고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숫자에 이른 것이다. 국내 시청률에 잡히지 않은 전 세계 시청률까지 합치자면 그 기록은 아마 1964년 비틀즈가 미국에 상륙한 순간을 실시간 중계한 방송의 순간 시청률를 뛰어넘는 것이었을 거다. 덕분에 나는 연말에 공중파 3사에서 공동으로 개최한 통합 연예대상에서 최고의 시사프로그램상과 최고의 피디상, 2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댓가로 방송 이후 쏟아지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 - 와 관련된 인터넷 기사만 589건이 양산되었다. -..
15. 진보와 진화 8 압 : 오 프리덤.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은 항상 정치사회적 현실을 극복하려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좀 더 나은 사회, 좀 더 자유가 확대된 사회, 좀 더 인간의 기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향해 발전해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그 기본권 존중의 대상이 인간을 넘어서 삼라만상에까지 그 범주가 넓혀져 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세상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허나 자라면서 저는 한 가지 큰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만약 날이 덥다면 우리는 옷을 벗으면 됩니다. 그리고 날이 춥다면 옷을 입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발전해오지 않았습니다. 날이 더우면 인간은 주변의 기온 자체를 낮추어버립니다. 날이 추우면 물론 그 반대로 합니다...
진보와 진화 7 진 :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나 : 네, 진 선생님 말씀하십쇼. 진 : 진보란 뭐냐. 진보가 꿈꾸는 세상은 뭐냐. 간단하게 말씀 드리자면 이런 겁니다. 진보란 한 발짝 더 나아가자는 겁니다. 진보적인 세상이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란 겁니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을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다소간 부정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의문을 가져야 하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고, 레닌이 공산주의의 깃발을 올렸을 때의 진보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의 폐단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유재산제도에 의한 부의 편중현상을 해결하자는 것이 진보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나누는 세상, ..
진보와 진화 6 나 : 네 여러분 그럼 다시 이어서 세기의 토크쇼 ‘진보와 진화'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 대표님께서 압둘 아자르 성하에게 ‘양말 벗기 무브먼트'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을 구원한다고 하는 데 대체 그 주체가 되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에 노동자는 포함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라는 논지의 질문을 하셨고, 아자르 성하는 고 대표님의 자세를 지적하며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얘기를 하자고 제안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고 대표님, 준비가 되셨습니까? 고 : 그거 뭐죠? 저기… 아. 그래. 오 프리더엄~ 나 : 하하 네. 준비가 되셨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아자르 성하 말씀 하시겠습니까? 압 : 오 프리덤. 제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