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1

멀고느린구름 2012. 6. 3. 09:43



이번에도 그남은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몇 번이나 소매 끝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자신의 코를 신뢰할 수 없다는 듯이. 약속 시간을 1분 정도 남겨 놓고 아래 편에서 걸어올라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검정색 코트를 입고 분홍빛 목도리를 입가까지 꽁꽁 맨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반묶음으로 단정하게 묶었다. 꽁지에는 하얀색 큰 리본이 매어져 있었다. 그녀의 큰 눈동자가 내 쪽을 보았다.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크게 흔들었다. 그남도 크게 손을 흔들었다.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남의 마음도 크게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몸 속의 무거운 것들이 일순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와 마주하고 서자 온 몸이 바람에 흩날릴 듯 가벼워졌다. 그남은 가까스로 발을 딛고 섰다. 몇 번을 보아도 감격적이었다. 그남은 그녀가 눈 앞에 있고, 함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만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남과 그녀는 버스정류장 쪽으로 나란히 걸었다. 


“웬 기타?”


그녀가 그남의 기타케이스를 보며 물었다. 그남은 밴드 친구들과 합주를 하고 오는 길이라고 둘러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남은 그녀의 고개짓이 새삼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남이 자신을 바라보며 까닭없이 웃고 있는 게 어색해서 도로를 지나는 차들의 불빛만을 주시했다. 버스가 어서 오기를 바랐다. 


“춥지?”

“응.”

“크리스마스에는 더 춥다던데.”

“응, 그렇다네.”


그남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실없는 이야기만 꺼냈다. 그녀는 조금 시큰둥해졌다. 날씨가 추운데 굳이 밖으로 자신을 불러낸 것이 못 마땅했다. 어서 버스에 올라 몸을 녹였으면 싶었다. 곧, 버스가 왔다. 두 사람은 버스에 올라 2인용 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우리 어디가?”

“모짜르트라고, 예술의 전당에 있는 파스타 가게야. 맛집으로 유명하대.”

“굳이.. 거기까지 가야했니? 실내로 가자니깐.”

“음... 예술의 전당도 일단 실내이긴 한데...”

“버스도 일단 실내이긴 하지라는 말과 똑같이 들리네요.”

“음... 그건 그렇기도 하네.”


그남은 그녀가 묻는 말 외에는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다. 그남이 궁리하면 궁리할 수록 그녀는 언짢아졌다. 그녀는 역시 우리는 틀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버스는 이내 예술의 전당에 닿았다. 지하 입구로 들어서자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다행이다. 그남은 적이 마음이 놓였다. 


“이것봐 실내지?”


그남은 그렇게 말해놓고, 그런 말은 하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 그녀는 그저 웃고 말았다. 실내 통로를 얼마간 걷자 다시 야외로 나가는 문이 나왔다. 밖으로 나왔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이동한 느낌이었다. 


“또 밖이잖아.”


그남은 레스토랑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녀를 달랬다. 다행히 레스토랑에는 빈 자리가 많았다. 두 사람은 왼쪽 구석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남은 그녀가 앉을 의자를 빼주었다. 그녀는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지쳐보였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왔다. 그남이 생각한 것보다 메뉴가 다양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도 그남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 먹을까?”

“추천 메뉴는?”

“음... 글쎄.. 봉골레?”

“그래, 그걸로.”

“음... 그래, 그럼 나도 같은 걸로.”


봉골레 두 개가 만들어지는 동안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남은 공연히 그런 생각만하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통유리 건너편으로 보이는 음악당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아하고 섬세한 선을 그리는 그녀의 옆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남은 감탄했다. 꽃다발과 생일 케이크는 언제 주어야 할까. 그남은 쉬이 결정하지 못했다. 어째서 이런 순간에 우유부단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남이 무슨 말이라도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허나 그남은 어떤 생각에 골똘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말을 꺼냈다. 직장에서 겪었던 일에 관한 것이었다. 특별히 오늘 같은 날에 얘기하고 싶은 내용은 아니었다. 그남은 그것도 모르고 그녀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우리는 틀린 것이 아닌가. 봉골레 두 개가 다 만들어져 나왔다. 봉골레가 나오자 그제서야 그남은 정리가 된 듯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11년 전의 이야기였다. 두 사람이 오늘과 같은 겨울, 연말 시 낭송 콘서트를 보기 위해 이곳에 왔던 때의 이야기였다. 그남은 그날 눈이 펑펑 왔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때 그남이 입고 있었던 옷과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이 오는 장면은 어째서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함께 한 과거임에도 두 사람이 바라본 것은 달랐다. 






2012. 6. 3. 멀고느린구름. 



'소설 > 긴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3  (0) 2012.06.10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2  (0) 2012.06.04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0  (0) 2012.05.31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9  (0) 2012.05.28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8  (0) 2012.05.26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