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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0

멀고느린구름 2012. 5. 31.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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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남은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른 한 송이의 장미 꽃다발과 케이크를 들고 어깨에는 기타를 둘러맨 채였다. 12월의 바람은 매서웠다. 남부터미널 앞은 저녁 중에도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돌아오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그남은 추운 탓에 실내로 들어가려다가도 터미널 실내에 가득한 어묵 냄새 때문에 밖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녀는 음식 냄새가 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가 오기까지는 아직 1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너무 일찍 왔다. 그남은 깜짝 이벤트라도 준비하자 싶어 먼저 예술의 전당쪽으로 걸었다. 오르막길 저편에서 유리조각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거리에는 걷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남은 꿋꿋이 길을 걸었다. 육교를 건너고, 예술의 전당 음악당 앞에 다다랐다. 그남은 공연을 보러 온 사람인 채하며 꽃다발과 케이크를 부스에 맡겼다. 마침, 서울시향 오케스트라의 모짜르트 연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남이 그녀와 가기로 한 레스토랑의 이름도 모짜르트였다. 음악당 맞은편이었다. 모짜르트에 들러 그남은 자리를 예약하고자 했다. 지배인은 예약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남은 할 수 없이 남은 자리를 둘러보고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발길을 돌렸다.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음식도 맛있어 보여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조명이 지나치게 밝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밝은 조명보다 조금 어둡고 은은한 조명을 좋아했던 것이다.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남이 그녀를 짝사랑하기 시작한 지 11년, 처음으로 그녀의 생일을 직접 축하해주는 날이었다. 그남은 한 순간 한 순간에 특별함을 부여하고 싶었다. 벤치에 앉아 기타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 잡았다. 조율을 확인하고 지난 한 달간 연습했던 곡을 다시 조심스레 연주해보았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손가락이 얼어붙어 잘 되지 않았다. 벤치에 그녀를 앉혀두고 연주를 하는 것은 어려울 듯 싶었다. 바람이 지나치게 찼다. 모짜르트에서도 마땅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오히려 부담을 느낄 가능성이 컸다. 빈 자리를 찾다가 오페라 하우스 실내에 빈 공간을 발견했다. 그남은 그곳에 놓여진 의자에 앉아 테이블 저편 의자에 그녀가 앉아있다고 상상하고 다시 기타를 연주했다. 오페라 하우스의 높은 천정 탓에 음 하나하나가 깊게 울렸다. 나쁘지 않았다. 공연이 없는 날이어서 드나드는 사람도 없었다. 벤치에 앉아 그남은 그녀를 위한 이벤트의 동선을 하나하나 마음 속에 짚어두었다. 


20분 남짓한 시간이 남았다. 그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남부터미널로 향했다. 이번에는 마을버스를 이용했다. 그녀와 함께 걸어오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라 버스의 노선을 미리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버스는 여러 곳을 돌지 않고 곧장 남부터미널로 옮아왔다. 10분이 남았다. 그남은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녀가 나타날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타나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추위가 가시는 듯했다. 5분 전이었다. 




2012. 5. 3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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