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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9

멀고느린구름 2012. 5. 28. 12:57




두 사람은 교회당을 나왔다. 적도의 바람이 끼쳐왔다.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고 나니 두 사람은 어색했다. 라타나 교회당 안에서 있었던 조금 전의 일이 먼 과거의 일처럼 여겨졌다. 여자는 혼란스러웠고, 남자는 허망했다. 좀처럼 누구도 먼저 작별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혹은 꺼내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얼굴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지 못했다. 라에티히의 언덕 아래 감춰진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땅만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정리되거나 해소되지 않았다. 엉켜 있던 실타래는 더욱 엉켜버리고 말았다. 여자는 어찌되었거나 남자의 곁을 떠나자고 마음 먹었다. 


“익스큐즈미.”


그때, 교회당 문이 열리며 푸른빛 수도복을 입은 수사가 나와 말을 붙였다. 손바닥을 펴 앞으로 내밀었다. 그 위에는 여자의 결혼반지가 놓여 있었다. 남자도 반지를 보았다. 여자는 황급히 수사의 손바닥에서 반지를 집어들어 손아귀에 감췄다. 


“땡큐...”


황망한 가운데 인사를 했다. 수사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떠올렸다. 남자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던 때였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왼손에서 결혼반지를 빼 제 옆 자리에 놓아두었던 것이다. 무엇을 감추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남자의 마음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결혼반지를 빼는 일이 어째서 예의가 되는지는 여자 자신도 알지 못했다. 


남자는 반지가 든 손아귀를 다른 손으로 감싸쥐고 어쩔줄 몰라하는 여자가 안쓰러웠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언덕 아래까지만 같이 걸을까?”

“응...”


여자는 순순히 응했다. 남자는 일부러 여자로부터 고개를 돌려 텅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한 점도 없었다. 그 사이 여자는 왼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걸었다. 죄책감에서 놓여나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뒤 남자는 다시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왼손 약지에 걸린 결혼반지도 확인했다. 남자의 걸음걸이가 변했다. 얼마 전부터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 같은 걸음걸이였다. 여자는 해명을 하고 싶었다. 


“그냥... 손가락이 좀 아파서 빼놨는데..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응...”


남자는 순순히 답했다. 여자는 자기 가슴에 물을 먹은 솜뭉치들이 꾹꾹 들어차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만을 하고 싶다. 여자가 결국 말을 꺼냈다.  


“아까... 아까 전에 말이야. 행복하냐고 물었었지...?”

“응. 넌 행복하다고 했고.”

“사실은... 말야. 모르겠어. 행복한지, 안 한지. 글쎄... 그런 거에 대해서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산달까... 딱히, 열심히 행복해져야겠다는 열망도 없어. 그냥 사람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게 말야. 그냥 반씩 반씩 겪으며 살게 되어 있는 것 같아. 오늘은 웃고, 내일은 울고, 오늘은 아프고, 내일은 낫고. 그냥 그런 걸 반복해가는 게 사는 거 아닌가. 사람이 그 이상의 것을 바라게 되면.. 그 정도 반반의 삶도 못살게 되지 않겠어..? 강렬하게 사람을 이끌었던 어떤 감정들이 그 이후에 펼쳐지는 초라한 삶 앞에서 얼마나 초라하게 시드는지.. 꽃처럼 살고 싶지 않아 이젠. 들풀처럼 혹은 침엽수처럼 도드라지진 않지만 자기만의 생명력을 지켜가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행복하냐 행복하지 않냐는 이분법을 넘어서 행복하든 행복하지 않든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그냥 사람의 생이지 않을까. 그러나 사실 잘 모르겠어. 난. 그래, 행복한 건 아닐지도 몰라. 근데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야. 그냥... 그냥 말이야. 이대로 흔들리지 않고.. 살아온 대로 살고 싶을 뿐이야.”

“지쳤구나...”


남자의 말에 여자는 울컥 눈물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자는 그제서야 자기가 지쳐 있다는 것을 안 사람 같았다. 안정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여겨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안정된 생이라도 10년 동안 달려오면 누구나 지치게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자신은 자기의 인생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람의 인생이 그저 다 그런 것이라고 묶어서 판단하고만 싶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정답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했지... 나만의 답을 찾고 그 답을 분명하게 믿고 살아보라고... 그래. 옳은 말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해볼게. 근데, 나도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생겼어. 너는.. 넌 말야.. 너무 네가 정한 답을 지키기 위해 살지는 마. 바람이 불면 부는 그대로,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보기도 해봐. 때때로 삶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건.. 머리가 정한 답이 아니라, 그 순간의 마음이기도 하니까. 흔들려도 괜찮아. 반드시 살아온 대로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


여자는 물기 어린 눈빛으로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남자도 잠시간 여자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여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자가 곁을 따랐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곱씹으며 걸었다. 언덕 가장 아래 입구에 닿았다. 올라올 때는 보지 못했던 커다란 포플러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포플러나무다.”


남자가 말하며 나무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도 올려다보았다. 촘촘한 잎사귀들 사이로 햇살이 비꼈다. 바람이 일었다. 햇살이 별빛처럼 빛났다. 


“그런데... 결혼반지는.. 왜 뺐었어..?”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잠시 틈을 둔 뒤 말했다. 


“그 순간... 가장 행복해지고 싶었어.”


남자가 답했다. 


  "그 순간, 나는 가장 행복했어."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남자는 오른쪽으로 난 길. 여자는 왼쪽으로 난 길이었다. 




2012. 5. 2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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