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할머님, 혹시 무섭거나 하진 않으셨어요? 곱단 : 무섭기는... 나 : 그래도 당시로 치면 빨갱이라고 하면 피난민들한테 공포였을 텐데요. 뭐 흔한 예로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했다가 살해 당한 애 얘기 같은 건 저도 어릴 때 구구단 외우듯이 듣고 자랐거든요. 곱단 : 선생님이 전쟁을 몰라서 그래요. 나 : 아, 저 할머님. 선생님은 안 쓰시기로 하셨잖아요. 곱단 : 아 참, 미안해요. 나 : 아, 아닙니다. 곱단 : 전쟁 통에는 빨갱이고 연합군이고 없어요. 적어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나를 죽이려는 사람과 죽일 생각은 없는 사람, 그렇게만 나눠져요. 빨갱이라고 해서 있는 대로 사람을 다 죽이고 다닌 건 아니었죠. 마찬가지로 연합군이라고 사람을 다 살려준 건 아니었어.... 나 : 그랬군요....
고모부와 고모는 그이가 풀려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자꾸만 그이의 일을 묻는 곱단에게 고모부는 그 사람 일은 입에도 담지 말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잘못하다가는 일가족 모두가 끌려가 동반 사형을 당하는 일도 있던 때였다. 곱단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말을 그때 처음 몸으로 실감했다. 아무 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멀리서라도 그이가 언제 죽었고, 어디에 묻혔다는 얘기만이라도 듣게 되길 바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이가 잡혀간 날 밤 곱단은 까닭없는 고열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잠결에 고모부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이가 군에 수송되어 가던 중 지프에서 뛰어내려 산으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산에 불을 놓을 것 같다고, 여기서는 겨울을 나기 힘들 것 같으니 곱단과 사위..
곱단 : 선생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요? 나 : 네? 곱단 : 가슴이 너무 아파서 더는 못하겠어요. 나 : 가슴이 어떻게 아프신데요? 곱단 : 얘길 한다고 선생님이 어떻게 제 가슴 속을 알겠나요... 내일 다시 봅시다. 부탁드립니다. 나 : 아뇨, 할머님... 그렇게 머리를 숙이시지 마시고요. 그렇게 하셔도 이건 안 되는 겁니다... 곱단 :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나 : 어유... 할머님, 알겠습니다. 근데 내일부터는 그 선생님 호칭도 좀 바꿔주세요. 제가 할머님보다 훨씬 덜 살았는데요. 특별기획으로 지면을 대거 할애하여 싣는 인터뷰도 아니고, 고작 한 페이지 정도가 할당되어 있을 뿐인, 잡지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인터뷰였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부장에게 항의 전화를 넣었을 테지만 ..
오늘 저녁에 저희 집에 밥 먹으러 오세요. 그이와 말숙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곱단을 돌아봤다. 방금 말 소리가 곱단에게서 난 것이 분명하느냐는 표정이었다. 그이의 손에는 그이가 ‘수레바퀴 아래서’라고 부른 책이 들려 있었다. 그이는 말숙이에게 독일 소설가가 썼다는 그 책의 내용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말숙은 글을 좀 읽을 줄 안다고 소설에 대해서도 아는 체를 하고 있었다. 곱단은 한 쪽으로 물러나 서가에 낀 먼지를 쓸어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숙은 그이가 마음에 든 눈치였다. 곱단은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곧바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쓸어담을 수 없었다. 밥 먹으러 오시라고요, 싫으세요? 그이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이내 정리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저녁 밥상 김곱단 할머니는 다시 말을 멈춘다. 나는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누른다. 어느새 석양 무렵이다. 할머니는 말을 지나치게 천천히 했던 것이다. 61년 전으로 타임슬립이라도 한 것 같은 할머니의 정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일어서며 기재를 켠다. 할머니는 미동도 없다. 눈을 껌벅이는 것을 보니 큰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인터뷰를 하다가 인터뷰이가 사망하는 일은 드물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 경우 초래될 여러가지 번거로운 일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할머니 물 좀 마시겠습니다. 라고 크게 외치고는 냉장고 문을 연다. 물병을 꺼내다가 우연히 찻잎이 든 유리병에 눈길이 멈춘다. 저 병일까. 설마. 물을 마시고 사랑방으로 돌아와 보니 할머니는 정원으로 걸어나가 코스모스와 소국, ..
다음 날 선 자리에서 곱단은 건너편 청년이 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제 본 노을빛만 떠올랐다. 곱단은 그이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한 번만이라도 말을 붙여봤으면 좋겠다. 고모는 시어머니가 될 청년의 어머니에게 그럼, 조만간 조촐하게 식을 올리자며 인사를 하고 제안했다. 곱단은 그저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쟁 통에 천애 고아가 되어버린 자기를 거둬준 분들이었다. 더 이상 짐이 될 수도 없었고, 일찍 혼인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다들 그렇게 혼인을 하던 때였다. 밤새 곱단은 자기 옆에 그이를 놓아보고는, 저는 그이의 연인이 될만큼 신여성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이의 목소리는 한 번쯤 들어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남자와 결혼하여 여느 아낙네처럼..
곱디 고운 봄 곱단네 가족은 연합군이 피우다 말고 버린 꽁초들을 모아 되파는 일을 했다. 이 업종은 유난히 경쟁이 치열했다. 곱단네처럼 일가족이 뛰어드는 경우도 많았다. 아직도 교전이 이어지고 있어서 위험한 경기도까지 올라갔다 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물론 대대적으로 꽁초 사업을 벌이는 경우로 운송 차량까지 두고 있는 것이다. 학교는 산자락에 칠판 하나 걸어두고 열리고 있었지만 곱단 같은 다 자란 여자아이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곱단은 아직도 글을 쓰고 읽을 줄을 몰랐다. 곱단의 부모는 전쟁이 나기 전 이북에 있을 때는 제법 벌이가 되는 식료품점을 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료품점은 군의 관리하에 들어갔고, 곱단의 아버지는 만주에서 벌인 항일독립전투 가담 경력 때문에 상사..
나 : 먼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노파 : 김곱단입니다. 나 : 네, 김곱단 할머님이시군요. 올해 연세는 어떻게 되십니까. 곱단 : 엊그제가 팔순이었어요. 나 : 아, 80세가 넘으셨는데도 이렇게 정정하시군요. 듣기로는 직접 저희 잡지사로 인터뷰 요청을 해오셨다는데, 특별한 연유가 있으십니까? 곱단 : 부끄럽지만... 제가 초등학교를 올해서야 졸업했어요. 한글도 이제 막 읽을 수 있게 되고 보니 꼭 새로 사는 것만 같고... 별 의미 없는 생이었지만, 그래도 80 먹은 노인네가 가슴에 품은 얘기 한 자락 누가 들어주면 좋겠다 싶어서 늦게 배운 글씨로 편지 한 통 보내봤지요. 나 : 네에. 그러셨군요. 편지를 보니깐 어떤 분을 찾고 계시다고 쓰셨는데 어떤 분인가요. 곱단 : 61년 전에 한 남자애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