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자 양준일 씨에게 반했다. 이것은 모종의 자기애가 아닐까 싶다. 그의 말씨와 태도, 생김새는 어딘가 조금씩 나와 닮았다. 그는 올해로 50대가 되었고, 나는 내년이면 40대가 된다. 재능이 반짝였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 그의 20대와 나의 20대를 억지로 맞추어 보며, 나의 10년 후를 다시 그려보게 된다. 오래전 30대 중반 즈음, 한 사람에게 마흔이 될 때까지 이름을 얻지 못하면 삶을 정리하겠노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스로 내뱉어놓고도 놀란 말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말은 다짐이라기보다는 미리 던져놓은 포기 선언이 아니었나 싶다. 그로부터 노력 아닌 노력을 해왔지만 아직 그다지 좋은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만큼 했으면 그만두는 게 역시 좋을까. 공연한 희망고문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
집에서 늘 바라보이던 산이 며칠 내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미세먼지 탓이다. 덕분에 목이 계속 칼칼하다. 공기청정기는 집필실을 지키고 있고, 나는 집필실에 출입하지 않은지 꽤 되어 간다. 사라진 산의 자리는 연한 잿빛의 안개로 채워진다. 아침에 소파에 앉아 멍하니 안개 속을 바라보고 있으면 끼루루- 끼루루- 하는 소리와 함께 먼 곳에서 온 새의 무리들이 줄지어 날아간다. '철새'라는 말이 정치인과 보도인들에게 오염되어, 나는 그들을 여행새라 부르고 싶다. 바야흐로 여행하는 새들의 계절이다. 강원도 철원에 살 때 3년 동안 여행새들을 겨울마다 가까이서 보았다. 이르면 10월 늦으면 11월쯤, 바이칼 호수 부근에서 날아올라 따뜻한 남쪽의 나라로 여행하는 수천 마리의 새들은 자연물로서의 인간이 지닌 한계를 ..
날도 추워지고 산더미 같은 직장 업무로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탓에 평일 중에는 집필실 구경도 못하고 있다. 내 집인데 신경 쓰지 않으면 구경도 못하는 공간이 있다는 건 좀 특별한 기분이다. 영앤리치가 된 기분이랄까. (전혀 '영'이 아니지만. 물론 '리치'도 아니다. 왜 쓴 거지.) 구름 정원에서 세 계절을 지내보니 역시 좋은 집은 좋은 거구나 싶다. 여러 일로 우울감이 계속되고는 있지만, 예전 오리빌라 시절처럼 집에 앉아 있으면 괜시리 서글퍼지는 일은 이제 없다. 구름정원에서는 오히려 우울하다가도 집안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야 그래도 제법 사네 나? 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뭐랄까, 약간 마음이 놓인다. 제대로 경제 관념이 박힌 청년이라면 월세를 줄이고 단칸방에 살면서 열심히 빚을 청산해..
어릴 적부터 별을 사랑했지만, 구름정원에 이사 온 후 특히 더 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간단히 문을 밀고 마당으로 나가 캄캄한 허공 사이를 올려다보면 거기에 별들이 빛나고 있는 덕분이다. 별자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 매번 책을 읽어도 금방 까먹고 만다 - 북두칠성의 생김새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어째서인지 구름정원의 마당에서는 북두칠성이 선명히 잘 보인다. 요즘은 내가 기르는 병아리라도 되는 듯이 거의 매일 밤 자기 전에 까막까막 흔들리는 여린 별빛들을 살피고 잠이 든다. 주말 동안 지구에 내려왔던 하나의 별이 또 그만 일찍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음이 무겁다. 허망한 죽음 하나가 더해질 때마다 지구의 중력도 점점 커지는 듯하다. 윤회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 쓸쓸하고, 아프게 떠..
그리하여 11월이 되었다. 앞의 이야기들은 많이 생략되었다. 5월 이후의 시간에 실체가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지난 6개월 속 계절들이 투명한 유령처럼 느껴진다. 내가 알던, 지지와 응원을 보내던 사람들이 벌써 네 사람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 무작정 글을 쓰며 시간을 견뎠다. 덕분에 조금은 나아진 듯하다. 삶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쓰기 시작한 소설 는 어느새 그냥 자기의 이야기를 시작해버렸고, 친구의 조언으로 시작한 회고록은 소소한 관심을 받으며 24년의 긴 인생을 항해 중이다. 내년에 도서관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불안했었는데, 다행히 일단 내년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다. 사랑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삶의 시절이다. 하지만 사랑을 제외하고 나니 아무 것도 그다지..
사람들은 대게 갓 볶은 원두로 내린 신선한 커피가 최고의 맛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맛을 평가하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맛칼럼니스트 같은 분들이 들으면 기함할지도 모르나 맛이란 상당히 주관적인 잣대를 지닌 것이어서 때때로 몇 년 동안 진열장 속에 썩혀 놓은 오래된 원두에서 기막힌 맛이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2015년 즈음에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베트남 커피 가루를 모카포트에 넣고 끓인 뒤, 아메리카노를 제조했다. 녀석은 지금 내 왼편에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점잖을 떨고 있다. 4년 묵은, 게다가 품격이 떨어지는 로부스타종의 커피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겠느냐 싶지만 적어도 어젯밤 내가 참지 못하고 갈아먹어버린 아라비카종의 케냐 AA의 맛보다는 한수 위다..
변명들이 늘어간다. 왜 아직 등단을 하지 못했나? 왜 아직 유명한 인물이 되지 못했나? 왜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나? 왜 아직 재산도 갖추지 못했나? 왜 아직 성격이 그 모앙인가? 세상은 (그리고 나 자신은) '왜 아직 -' 으로 시작되는 수 많은 질문들을 나에게 종종 던진다. 그럴 때면 무엇 하나도 시원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이러쿵저러쿵 정신승리를 위한 변명들을 뒤적거리게 된다. 나를 알아보는 심사위원이 없어서요, 세상 사람들의 취향과 내 취향이 달라서요, 돈도 없고 성격도 나빠서요,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가져본 일이 없어서요, 천성이 그 모양이라서요. 라고 세상의 질문에는 대충 변명을 하고 돌아서지만, 이따금 나 자신이 스스로 던지는 똑같은 질문 앞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
글이 잘 써지지 않는 현상은, 손아귀에 힘이 주어지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2분 내에 팔굽혀펴기 100개를 해내야 한다는 미션을 받고, 단기간에 무리한 근육 운동을 해야 했을 때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1시간 정도의 하드 트레이닝을 마치고 나면 손아귀에 힘이 잘 주어지지 않았다. 주먹을 움켜쥐는 것쯤이야 언제든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그건 뭐랄까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큼이나 확고한 믿음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기분은 묘하다. 물안개가 사방을 뒤덮은 익숙한 거리 위를 걷는 기분이다.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면 손목 즈음에서 형체가 스러지고 마는 안개 속에서는 익숙하다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이내 내 존재에마저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주말 내내 다락방에 누워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