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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날도 추워지고

멀고느린구름 2019. 11. 28. 23:46

날도 추워지고 산더미 같은 직장 업무로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탓에 평일 중에는 집필실 구경도 못하고 있다. 내 집인데 신경 쓰지 않으면 구경도 못하는 공간이 있다는 건 좀 특별한 기분이다. 영앤리치가 된 기분이랄까. (전혀 '영'이 아니지만. 물론 '리치'도 아니다. 왜 쓴 거지.)

 

구름 정원에서 세 계절을 지내보니 역시 좋은 집은 좋은 거구나 싶다. 여러 일로 우울감이 계속되고는 있지만, 예전 오리빌라 시절처럼 집에 앉아 있으면 괜시리 서글퍼지는 일은 이제 없다. 구름정원에서는 오히려 우울하다가도 집안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야 그래도 제법 사네 나? 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뭐랄까, 약간 마음이 놓인다. 제대로 경제 관념이 박힌 청년이라면 월세를 줄이고 단칸방에 살면서 열심히 빚을 청산해 나가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상식적인 면들이 꽤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르니 사는 동안 정도껏 누리고 살자는 심보로 사는 중이다. 덕분에 결혼 같은 일은 꿈도 꿀 수 없지만... 언제 이뤄질지 알 수 없는 일들을 위해 지금을 덜 아름답게 살고 싶지는 않다. 

 

몸이 약해진 것 같아서 예전에 독학으로 익혔던 몇 가지 무술과 대학 검도부에서 기본기를 배우고, 역시 독학으로 다진 검도 수련을 지난 주부터 다시 시작했다. 내 유일한 특기였던 성실함이 어디로 다 증발한 건지 이틀에 한 번 정도씩 대강대강 해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꽤 체력이 회복되는 게 느껴진다. 오늘은 달이 안 보여서 별을 베는 연습을 했는데, 내일은 달을 찾아서 베어야지. 별이 너무 작아서 조준하기가 어려웠다. 

 

황교안은 단식 8일 만에 입원했던데, 나는 트위터 글쓰기 단식 6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아무말 대잔치의 욕구불만이 상당하다. 덕분에 이렇게 에세이 같지도 않은 에세이를 에세이라고 중얼중얼 적고 있는데, 몹시 졸려서 잠깐씩 눈을 감고 하품을 하면서도 이 글을 적고 있다는 걸 내가 지금 쓰지 않았으면 아무도 몰랐으리라. 역시 아무말이나 하니까 기쁘다. 소설 쓰기는 대체로 아무말 대잔치의 본능을 타고난 이들이 하는 유희일 것이다. 내일 아침에는 집필실에 들어가볼 수 있을까. 새벽에 들어가면 너무 춥더라. 오리 요정 같은 분이 새벽 여섯 시 정도에 미리 집필실 난로를 켜주면 좋겠다. 그러면 분명 내일 아침에 브런치에 연재 중인 <우주의 의미> 14화를 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우리 집 오리 어린이 꽉꽉이에게 하는 말은 아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2019. 11. 2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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