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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게 갓 볶은 원두로 내린 신선한 커피가 최고의 맛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맛을 평가하는 것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맛칼럼니스트 같은 분들이 들으면 기함할지도 모르나 맛이란 상당히 주관적인 잣대를 지닌 것이어서 때때로 몇 년 동안 진열장 속에 썩혀 놓은 오래된 원두에서 기막힌 맛이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2015년 즈음에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베트남 커피 가루를 모카포트에 넣고 끓인 뒤, 아메리카노를 제조했다. 녀석은 지금 내 왼편에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점잖을 떨고 있다. 4년 묵은, 게다가 품격이 떨어지는 로부스타종의 커피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겠느냐 싶지만 적어도 어젯밤 내가 참지 못하고 갈아먹어버린 아라비카종의 케냐 AA의 맛보다는 한수 위다. 어디까지나 내피셜이다. 내일 즈음 다시 단골 커피가게에서 볶은 지 2주 정도 지난 적당한 원두를 데려와 마신다면 역시 이쪽이라고 감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오늘 아침에는 이 오래된 베트남 커피가 세상의 왕이다.
오래된 노래들을 듣거나, 100년, 200년 전에 쓰여진 문학 작품들을 읽으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이미 다 나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창작'이라는 미명하에 예술가들은 계속 계속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은 신작을 향유하는 것을 즐긴다. 좋아하는 소설가의 신작을 3년 전에 사두고 아직 읽지 못했는데, 이미 그 소설가는 새로운 작품을 얼마 전 출간했다. 그렇게 무수한 신작들이 세상에 쌓여 간다.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늘 자문하게 되지만 결국엔 아무 대답에도 이르지 못한다. 다만, 어제는 신선한 커피를 마셨고, 오늘은 오래된 커피를 마셨다.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 아침의 커피가 조금 더 맛있었지만, 어젯밤의 커피는 그대로 제 역할을 다하여 주었다. 지나간 것도, 새로운 것도 결국에는 다 내 마음 속에 들어와 반짝이는 것과 반짝이지 않는 것으로 나뉘어질 따름이다. 유한한 수명을 지닌 인간에겐 사실 지극한 현재뿐 아니라, 지극한 과거도 다 새로움이다. 아직 미처 마주하지 못한 것들이다.
세상과 삶에는 우리가 아직 미처 마주하지 못한 것들이, 알고 있지 못하는 진심들이, 밝혀지지 못한 사실들이 도처에 있다. 그러니 무엇에 대해서든 우선은 겸허해져야 할 것이다. 함부로 판단하고 함부로 내뱉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 마음을 보태어 응원하던 젊은 예인이 세상을 등졌다. 내가 떨쳐버리지 못하던 오만함과 비겁함이 그의 등을 떠미는 데 한몫을 한 것 같아 몹시 부끄럽고 내내 마음이 무겁다. 문득문득 울음이 솟구친다.
몇 년 사이, 마음으로 친애하던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나며 내게 작은 추 하나씩을 건넸다. 한 사람이 이어받아 감당하기는 어려우나, 아마도 나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조금씩 그 추의 무게를 나누어 가지지 않았으려나 싶다. 살아 있는 동안 기억할 것이다. 내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만큼 그대들의 몫을 나누어 지리라 다짐한다. 좋은 세상에서 우연히라도 다시 마주칠 때, 그때는 부끄러움 없이 당신을 향해 웃을 수 있기를.
미안합니다. 먼저 별이 된 청춘의 명복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2019. 10. 1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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