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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구월은 끝나버리겠지만

멀고느린구름 2019. 9. 30. 07:56

글이 잘 써지지 않는 현상은, 손아귀에 힘이 주어지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2분 내에 팔굽혀펴기 100개를 해내야 한다는 미션을 받고, 단기간에 무리한 근육 운동을 해야 했을 때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1시간 정도의 하드 트레이닝을 마치고 나면 손아귀에 힘이 잘 주어지지 않았다. 주먹을 움켜쥐는 것쯤이야 언제든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그건 뭐랄까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큼이나 확고한 믿음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기분은 묘하다. 물안개가 사방을 뒤덮은 익숙한 거리 위를 걷는 기분이다.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면 손목 즈음에서 형체가 스러지고 마는 안개 속에서는 익숙하다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이내 내 존재에마저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주말 내내 다락방에 누워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허무하지만 로맨틱한 소설에 대해서 잠시 궁리했다. 제목은 일주일 전에 정했다. 정작, 내가 한 일은 챙겨보고 있는 드라마를 챙겨본 일과, 넷플릭스에서 보던 중2병 애니메이션을 마지막 화까지 연달아 시청한 것, 그리고 인류를 지키는 내용의 게임을 오랜 시간 플레이한 것이다. 책은 전혀 읽지 않았다. 최근 한 달 공모전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난독증이 생겼다는 핑계도 마련해놓았으니 거리낌은 없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면 다시 책도 읽고, 매일 새벽 소설을 써야지, 피아노도 배우고, 유튜브 채널도 만들어봐야지, 다시 새로운 모래성을 쌓아가 봐야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게 대체 언제부터였는지도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사실, 내 모든 문제는 내 욕망이 주어진 조건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무모한 이상을 이른 시기에 조금 더 잘 접어놓을 수 있었다면, 훨씬 더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곁에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그토록 되고 싶었던 다정한 인간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리라.

 

종종 상상해본다. 무척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의 모습을. 최소한 50세까지는 자리가 보장이 되어 있는 직장을 다니며, 25평 전세집 정도에 살고 있고,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노란색 뉴비틀 자동차가 인근에 주차되어 있어서, 몇 달쯤 곤란한 일이 연달아 생겨도 인생 전체가 흔들리지는 않아도 좋을 그런 삶. 마음에 품은 오직 단 한 사람에게만 내가 가진 빈약한 사랑의 에너지를 충실히 사용하면 그만일 그런 삶. 아마도 주말 내내 플레이한 게임 속의 주인공들이 지키고자 했던 '평화'의 현현일 그런 삶 말이다. 

 

그러나 나는 미처 나의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체로 불확실한 꿈 속에 뛰어들며 살아오고 말았다. 싫어하는 일을 좀처럼 오래하지 못하고, 마음에 이끌리는(그리고 돈이 되지 않는) 일들만을 덥썩 선택하며 세월을 지나왔다. 미래를 그다지 고려하지 않고, 과거나 현재 속에 머물렀다. 그 결과 숱한 후회를 하고, 여러 종류의 다양한 고통을 겪고 말았다. 나의 후회와 고통을 묶어서 재조립한다면 지금껏 나온 드라마의 30-40%는 쓸 수 있을 것이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지쳐버리면 보통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쉬기 마련이다. 내 인생은 애초에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는 일이 허락되지 않은 인생이다. 그렇기에 나는 글이 써지지 않음에도 또 이렇게 무리해서 아무 말 대잔치를 펼쳐본다. 주먹을 움켜쥘 수는 없어도, 손가락을 하나 둘 까딱거려 본다. 스무 살의 내가 한 말을 다시 나에게 건넨다. "희망 없는 삶을 견디는 것도 희망뿐."

 

소설은 아니지만, 아무튼 글은 썼다.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다. 구월은 끝나버리겠지만.

 

2019. 9. 3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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