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열린책들 저 멀리의 수평선을 바라보는 곳 이상하다. 1940년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한 여성 작가와 내가 어쩌면 이렇게 깊은 곳에서 서로 마주할 수 있을까. 벌써 작년의 일이다. 표지나 작가의 사진을 보고 책을 고르는 나의 습관을 알고 있던 친구가 집을 방문하며 내게 책 두 권을 선물로 주었다. 아니 에르노의 와 였다. 친구의 방문이 있었던 얼마 뒤 를 읽었다. 하지만 왠지 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어째서? 를 읽는 내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작가의 어머니와 내 어머니는 다른 듯 유사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를 읽는 동안 나는 여러 번 상념에 젖어야 했다. 를 꺼려한 것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될까봐 우려가 된 탓이다. 우려는 빗나가지 않..
행복이 아니라도 괜찮아 - 시와 지음/책읽는수요일 서른의 한가운데를 들여다보다 내가 스무 살 무렵, 세상에는 이제서야 이메일이라는 것이 생겼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다음 카페를 개설했었다. 그 무렵 나도 '별의 강 간이역'이라고 하는 나만의 공간을 웹상에 만들었다. 나의 친구들, 고교시절 출간된 소설 작품집 덕에 나를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우연히 간이역에 멈춰 선 사람들 30여명이 그곳의 회원들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주로 내게 일어나고 있는 청춘의 사건들에 대한 수필을 썼다. 그 중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는 글이다. 서점에서 시와의 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나는 자연스레 그 글을 떠올렸다. 나의 청소년 시절은 불행의 종합 백화점이었고 그 시절을 통과하면서 자연스럽게 ..
테러의 시 - 김사과 지음/민음사 불편한 이야기, 불편한 독서 처음 서점에서 '김사과'라는 이름을 접했을 때, 그 이름에 반했다. 얼마 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그녀가 배수아를 흠모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목했을 때 또 한 번 호감을 느꼈다. 그로부터 1년 정도가 지나 그녀가 이 작품 를 낸 뒤 한 매체와 인터뷰한 내용을 읽게 되었다. 한국 작가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젠가 꼭 이 작가의 작품은 읽어보아야겠다는 다짐을 갖게 했다. 그리고 다시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때의 그 소설 를 읽게 되었다. 나 를 먼저 읽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김사과의 소설을 읽게 된다면 반드시 부터가 좋겠다고 생각해 왔기에 자연스레 이 책을 먼저 펼치게 ..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지음/마음산책 푸를 청에 봄 춘 이번 학기 동안 국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자기만의 책을 짓게 했다. 그 중 한 학생이 이라는 이름의 소설집을 냈다. 그 속에 든 한 편의 소설 제목에 내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푸를 청에 봄 춘'. 익숙하게 보아온 문장이었지만 묘한 울림이 있었다. 한 번 마음에 인 파문은 쉬이 잦아들지 않고 오래오래 원을 그려 나가고 있다. 동네서점을 표방하는 홍대의 땡스북스에서 최근에서야 을 구입해 읽었다. 베스트셀러에 손을 가져가는 일은 만원 지하철에 오를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 지하철이야말로 나를 목적지에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데려다줄 것이 틀림 없을 경우에는 더욱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나는 대체로 만원 지하철에는 오르지 않는다. 조..
비포 미드나잇 (2013) Before Midnight 7.7감독리차드 링클레이터출연에단 호크, 줄리 델피, 샤무스 데이비-핏츠패트릭, 아리안느 라베드, 아티나 레이첼 챙가리정보로맨스/멜로 | 미국 | 108 분 | 2013-05-22 글쓴이 평점 미드나잇 인 파리 (2012)Midnight in Paris 7.9감독우디 앨런출연오웬 윌슨, 마리옹 꼬띠아르, 레이첼 맥아담스, 애드리언 브로디, 카를라 브루니정보코미디, 판타지, 로맨스/멜로 | 미국, 스페인 | 94 분 | 2012-07-05 글쓴이 평점 돌이켜보면 자정이란 시각에 깨어 있어 본 적이 그리 많지 않다. 항상 글을 쓰며 살아왔지만 나는 새벽형 인간이거나 아침형 인간에 가까워서, 착실하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해온 것이다. 11시 ..
태연한 인생 - 은희경 지음/창비 태연한 인생에 태연히 저항하다 "자신은 사라져버린 별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진 것은 완결된 것이며 완결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죽은 것이다.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고독 역시 스스로 의식함으로써 살아 있을 뿐이었다. 이유를 깨달았다거나 시간에 지쳤다거나 하는 명분은 어리석고 공허했다. 어떤 일이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종결되는 것이며 때가 되었다는 말은 그때를 알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260P 얼마 전 생소한 단어가 언론의 입에 오르내렸다. 슈퍼문. 이전부터 과학 서적 등에서 몇 차례 목격한 단어이긴 했지만 일상적으로 보는 기사에 이 단어가 등장한 것은 이색적이었다. 사람들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이 이색적인 단어를 언급했고, 뉴스들은 앞 다투어 그날..
작년 여름, 장재인의 '여름밤' EP 음반이 발매되었다. 음반에 수록된 동명의 타이틀곡 '여름밤'을 나는 무척 사랑하게 되어 이제 여름만 찾아오면 자연스럽게 "이런 날에는 역시 '여름밤'이지." 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어제와 엊그제, 그리고 오늘, 아마도 내일 역시 '여름밤'을 듣게 되지 않을까 싶다. 봄이라는 계절이 시작의 의미와 풋풋함의 정서를 지니고 있다면 역시 여름은 열정과 절정의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싱그럽게 빛나는 초록 잎새들과 쨍한 거리, 몸을 들뜨게 하는 온도. 여름에는 아무래도 청춘이 어울린다. 질주와 일탈, 무모함과 공허라는 단어들도 떠오른다. 장재인의 '여름밤'에는 어쩐지 그런 모든 것들이 담겨 있는 것만 같다. 대체로 나의 여름에는 이별 사건이 많았다. 아주 어린시절에는 어머니..
피로사회 -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우리는 스스로 꿈꾸고 있는가 책이 참 곱다. 새로나온 책들의 더미에서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감격했다. 곧 책을 둘러싼 갖가지 미사여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 출신의 학자가 독일의 철학계를 발칵 뒤집었다는 것이 수많은 미사여구들의 집결점이었다. 당시 한국 독서계는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마이클 샌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 법한 사람도 그가 '하버드대 교수'이며, '전설적인 하버드대 명강'을 펼쳤다는 정보를 통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에게 친근감을 표했을 것이다.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신비주의적인 시각으로 왜곡해서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를 지적하며 제시한 '옥시덴탈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반대로 동양인이 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