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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 8점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열린책들


저 멀리의 수평선을 바라보는 곳


이상하다. 1940년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한 여성 작가와 내가 어쩌면 이렇게 깊은 곳에서 서로 마주할 수 있을까.

벌써 작년의 일이다. 표지나 작가의 사진을 보고 책을 고르는 나의 습관을 알고 있던 친구가 집을 방문하며 내게 책 두 권을 선물로 주었다.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와 <남자의 자리>였다. 친구의 방문이 있었던 얼마 뒤 <한 여자>를 읽었다. 하지만 왠지 <남자의 자리>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어째서?

<한 여자>를 읽는 내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작가의 어머니와 내 어머니는 다른 듯 유사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한 여자>를 읽는 동안 나는 여러 번 상념에 젖어야 했다. <남자의 자리>를 꺼려한 것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될까봐 우려가 된 탓이다. 우려는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살아야 했던 삶과 아마도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전후 세대에 속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 다 가난한 노동자 계급의 자녀로 태어났고, 대한민국에서 중산층이라고 부르는 계층에 조차 단 한 번 속해 본 일이 없는 분들이다. 당연히 대학교라는 것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청소년 시절에 이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되어야 했던 분들이다. 문화보다는 생활이 우선이었고, 우아한 기품이나 지적인 유희, 고상한 취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 부모님 아래서 나는 돌연변이로 태어났다. 나는 도무지 주어진 환경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우아한 기품과 지적인 유희, 고상한 취미에 몰두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 나를 부모님은 뭐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어서 '계집애 취향'을 가진 조금 부족한 사내아이로 판단했던 것 같다. 어릴 때 부모님이 내게 취했던 교육의 기조를 떠올려보면 어떻게든 이 미숙아를 밖에 내놓을 수 있는 당당한 사내아이로 키울 것인가 하는 거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부모님의 교육 목표는 대실패로 결론이 났다.

아니 에르노 역시 노동자로 태어나 노동자와 소상인의 삶의 굴레에서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한 부모님 곁에서 자랐다. 그리고 초등교사가 되었다가, 작가가 되고 교수가 되었다. 부모님이 살았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가 과거에 겪었던 일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작가나 교수가 된 것은 아니지만 초등교사는 되었다. 아니 에르노와 나 사이에 평행이론 같은 것이 적용된다면 고맙게도 나도 작가나 교수가 될 수 있는 걸까.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 본다. 어떤 가치 평가나 꾸밈 없이 담담한 문체로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듯 사실 그 자체의 흐름만을 따라간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흘러가다보면 불현듯 작가의 아버지가 아닌 나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만다. 작가는 개인의 아버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뿐이지만 어느새 그 미시사는 전후 세대의 아버지를 둔 모두의 보편사로 점차 변모한다.

부유한 집안의 친구가 방문했을 때, 작가의 아버지는 주말에만 입는 정장을 입고, 말투를 최대한 우아하게 고쳐서 말했다. 배운 것이 많지 않고, 노동자의 삶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조건을 타고 났지만 부단한 노력을 통해, 소도시의 자영업자로까지 신분을 상승시켰다. 그것은 그의 빛나는 훈장이다. 그러나 세월이 갈 수록 훈장은 점차 빛이 바래진다. 자영업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아버지보다 더 많은 부를 보유한 자영업자들, 더 훌륭한 가게들이 생겨난다. 아버지는 더 이상 따라잡을 수가 없게 되고 파도에 밀려나듯 원래의 뒷 자리로 밀려나오고 만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먼 수평선 너머까지 가버린 딸을 바라보는 것이다. 가까이 있던 것이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을 때의 감정... 그것은 정말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과 유사한 감정이다. 아름답고 그리운, 영영 가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환상성을 수평선은 담담하게 떠올리며 저 멀리 서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서른 무렵을 기억한다. 그때는 나도 이미 국민학생이었으니까. 지금 나는 18평 크기의 방 세 개짜리 빌라에서 혼자 살고 있지만, 나와 같은 나이에 아버지는 5~6평 남짓의 전월세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형,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식구를 부양했다. 집에 있는 가구라고는 낡은 티비와 천으로 된 옷장이 전부였고, 커다란 이불 하나로 네 식구가 함께 덮고 잤었다. 아버지의 월급은 지금 내가 버는 것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어머니를 도와 집에서 편지 봉투를 만들 거나, 인형 눈을 붙이는 부업을 하곤 했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로부터 아주 멀리 와 있다. 아버지와 내 삶이 온전하게 포개어질 일은 앞으로도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순간들은 모두 청소년 시절과 함께 지나가버렸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대체 무얼까. 어떤 이들은 부모님의 삶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 삶의 굴레를 반복해 간다. 돌고 돌고 돌게 되는 삶이다. 내가 멀리 떨어져 나온 지금의 삶 역시, 누군가는 이 삶을 버리고 저 삶으로 옮겨 갔을 삶일 것이다.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조금 더 먼 곳으로, 그리고 때론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는 순환의 역사 속에 인간은 아주 가까운 곳만을 바라보도록 설계 된 채 살아가고 있다.

한 때는 자본주의의 암시에 따라 더 저급한 삶과 더 고급한 삶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그래서 부모님과는 다른 더 고급한 삶으로 전심전력을 다해 올라가야 겠다고도 생각했다. 그 모든 감정의 파고를 겪었을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와 <한 여자>를 통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모두 그저 삶일 뿐이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 <남자의 자리>를 통해 아버지를 <한 여자>를 통해 어머니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자본은 우리가 주거하는 집의 평수를 구별 짓는 것을 통해, 우리의 마음까지 갈라 놓으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종내에는 실패할 것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화해하는 것을 통해 더 큰 기쁨을 얻도록 설게되었으므로. 나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우리는 모두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다만 주어진 과제가 다를 뿐일 것이다.


2013. 7. 3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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