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 태연한 인생 (반디 & View 어워드 선정)

태연한 인생 - 은희경 지음/창비

태연한 인생에 태연히 저항하다  

"자신은 사라져버린 별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진 것은 완결된 것이며 완결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죽은 것이다.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고독 역시 스스로 의식함으로써 살아 있을 뿐이었다. 이유를 깨달았다거나 시간에 지쳤다거나 하는 명분은 어리석고 공허했다. 어떤 일이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종결되는 것이며 때가 되었다는 말은 그때를 알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260P

  얼마 전 생소한 단어가 언론의 입에 오르내렸다. 슈퍼문. 이전부터 과학 서적 등에서 몇 차례 목격한 단어이긴 했지만 일상적으로 보는 기사에 이 단어가 등장한 것은 이색적이었다. 사람들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이 이색적인 단어를 언급했고, 뉴스들은 앞 다투어 그날의 슈퍼문 목격담을 보도했다. 누가 국문학도 아니랄까봐 나는 '슈퍼문'이라는 용어보다 '대보름'이라는 말이 더 귀엽고 몽환적이지 않은가 하며 투덜거리다가 문제의 달을 목격했다. 붉고 거대한 대보름달을 홀린 듯 바라보며 <태연한 인생>의 위 문장을 떠올렸다. 

"사라져버린 별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은희경 작가의 소설을 참 오랜만에 읽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내가 택한 첫 신인작가였다. 그가 등단했던 무렵, 나는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문예부 부원이었다. 당시 문예부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던 공지영이나 신경숙 외의 다른 한국 작가의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을 하루 종일 서성였다. 그러다가 품에 안고 온 책이 바로 <새의 선물>이었다. 사르트를 연상시킨다는 화려한 광고가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에 와서 읽기 시작한 <새의 선물>은 문자 그대로 황홀했다. 제법 두꺼운 책이었지만 브레이크 없이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듯이 읽었다. 나는 '대작가'가 될 그릇을 발견했다고 기뻐했고, 이후 발간되는 은희경 작가의 책을 모두 구입했다. <타인에게 말 걸기>,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고교 시절 동안 이런 은희경의 책들에 푹 빠져 살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이후 인문학 서적과 철학 서적에 좀 더 경도되면서 <마이너 리그> 이후의 책들은 잘 읽지 않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묘하게도 은희경 작가는 <새의 선물>과 <타인에게 말 걸기>를 출판하며 누렸던 신진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지위를 조금씩 상실해 갔다. 내가 흠모하는 작가 목록에서도 점차 후 순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실재 작가를 만나서 함께 방송도 하고, 소주 잔을 기울이는 일까지 겪었지만 좀처럼 그의 소설을 다시 읽게 되지는 못했다. 

  최근작 <소년을 위로해줘>를 집필하는 과정을 트위터에서 지켜보면서 조금씩 그가 작가로서 어떤 고민을 하며, 어떤 세계로 옮겨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허나 <소년을 위로해줘>는 그 제목에 대한 거부감과 표지에서 전해지는 촌스러움이랄까 등등이 작용하여 역시 읽지 않게 되고 말았다. 

  아마도 그대로인 상태였다면 나는 영영 은희경 작가의 책을 펼치지 못했을 것이다. 한 권의 책과 한 사람이 만나는 것은 그 자체로 어쩌면 대단한 인연인지도 모른다. 한 권의 책이, 특히 그것이 진지하게 쓰여진 소설이라면, 하나의 삶과 하나의 삶이 만나는 일과 같다. 그 인연에는 분명 특별함이 있다. 

   올 초 여름 잠못 이루는 밤이 있었고, 차분한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음악이 아닌, 이야기를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였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김영하 작가의 팟캐스트를 들었고, 김영하 작가는 바로 은희경 작가의 <태연한 인생>을 예의 그 무심한 목소리로 읽어내려 갔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책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고, 다음 이야기에 깊은 호기심을 품었다. 태연한 인생이라는 제목이 주는 울림 또한 좋았다. <태연한 인생>은 책 표지와 작가의 사진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나의 구입 도서 선정 기준에도 합격이었다. <태연한 인생>은 그렇게 내 삶 속으로 들어왔고, 태연하게 나의 새벽을 지배했다. 

  요셉과 류, 두 남녀 화자에 의해 진행되는 이 소설은 미시사와 거시사라는 두 흐름이 한 권의 책 속에 공존하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요셉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서사는 불과 몇 일 사이에 발생하는 일이지만, 류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서사는 류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마흔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류의 현재에까지 이르는 긴 시간을 다룬다. 요셉의 미시사는 그의 구체적인 언행과 태도로서 그가 살아온 삶 전반에 대해 유추하게 만들고, 류의 거시사는 그가 가진 거대한 삶의 흐름으로부터 그가 현재 어떠한 감정과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고 있을지 유추하게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요셉과 류의 서사는 한 사람의 생의 서사로 겹쳐진다. 10년 전의 과거에  요셉과 류가 한 때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렸던 연인 사이였다는 것이 암시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비슷한 인생의 경험, 혹은 흐름으로부터 잉태된 동류의 인간형이다. 요셉이나 류나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해 회의적이다. 둘 다 '사랑'이 구원의 비책이라는 것에 회의적이며 얼마간 거리를 갖고 자기를 타자화 시키며 자신의 삶을 제3자의 것처럼 구경하려 한다. 여러번 반복해서 등장하는 '경마장의 종마 교배기'는 축약된 화자들의 인생처럼 읽힌다. 

  화려한 경마경기 이면에서는 우수한 종마를 탄생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펼쳐진다. 우선 우수한 종마를 잉태할 암말이 있고, 그 우수한 암말에게 최상의 정자를 제공할 혈통 좋은 숫말이 있다. 하지만 암말은 쉽게 숫말의 씨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수한 숫말이 정자를 제공하기 전까지 암말을 성적인 흥분 상태로 몰아갈 작업꾼, 시정마의 존재가 필요해진다. 시정마는 정자를 제공할 숫말에 비하자면 왜소하고 볼품없는 말에 지나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 암말을 성적인 흥분 상태로 몰아간다. 그리고 드디어 암말이 숫말의 정자를 받아들일 채비가 되었을 무렵 시정마는 사람들에 의해 마굿간 밖으로 끌려나가고 만다. 그리고 그때를 노려 혈통 좋은 숫말이 달려가 암말의 난자에 정자를 심는다. 그 과정은 불과 10여 초에 지나지 않는다. 임무를 다한 숫말 역시 밖으로 퇴장하고 남는 것은 암말과 암말의 난자 속에 잉태될 새끼 말밖에 없다. 

  이 말들은 어느 하나도 주체적이지 않고, 어느 하나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 암말은 원치 않는 임신을 강요 당했고, 자기가 마음을 연 상대의 정자를 받지도 못했다. 시정마는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그 결과는 다른 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혈통 좋은 숫말은 단지 정자를 제공하는 기능에 충실했을 뿐, 암말과 사랑을 제대로 나누지도 못했고, 태어나는 새끼말의 아빠 노릇을 할 수도 없다. 당연히 어느 하나도 상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모두가 어떤 하나의 기능, 우수한 혈통의 유지라는 제3자에 의해 강압된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반대로 보자면 - 소설 속 도경의 말처럼 - 이러한 삶에 긍정하고자 하는 입장이라면 모두가 각자 갖고 싶은 것을 가지게 되었다. 암말은 자신을 닮은 귀여운 새끼말을 갖게 될 것이고, 시정마는 암말의 사랑을 얻었고, 혈통 좋은 숫말은 좋은 정자를 손쉽게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평생 말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게 된다. 

  삶은 역시 부조리하다. 그 부조리를 알아버린 이들에게는 더욱 더 부조리하다. 그들에게는 세두 가지의 선택항이 존재할 것이다. 저항하거나, 투항하거나. 일단 저항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그 저항하고자 하는 힘만큼의 반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인생은 무척 고달픈 전장이 되고 만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태연한 인생>의 두 화자 역시 투항보다는 저항 쪽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허나 이들의 저항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저항과는 달라 보인다. 한 사람은 삶을 비꼬는 것을 통해, 현실을 바꿀 힘은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는 정신 승리를 통해, 순결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순결성을 감추고 있는 것을 통해, 그리하여 눈을 감고 캄캄하게 외로워지는 것을 통해 저항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현실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똑바로 응시하며 관조적으로 그 위를 걸어가는 것을 통해, 태연하게 고독해지는 것을 통해 저항한다. 

  이것을 저항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허나 누구도 그것은 저항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누구나 하나 이상의 가면을 쓰고, 가슴 속에 일정한 순결성을 간직해 둔 채, 일정한 삶에 대한 저항감을 갖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것이 어떤 순간을 맞아서는 갑작스럽게 커지기도 하고, 혹은 사그라들기도 한다. 그 마음의 동요를 섣불리 내보이지 않는 채로 우리는 각자의 태연한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떤 이는 태연한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연기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자신의 삶을 정말 태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끝까지 자기가 연기자일 뿐이라는 정체성을 지켜간다. 나는 어느 쪽일까. 만약 전자 쪽이라면... 창 밖에 눈이 내리는데도 창을 닫아두고 있어 바라보지 못하는 쪽이라면. 나는 창을 열고 그 눈길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고 싶다. 결국 아름다움은 고통 속에서 잉태되는 것일 테니까. 

2013. 7. 3.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