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거리에는 추억이 없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도 어느 새 1년이 흘렀다. 긴 인연과의 이별을 마주한 지도 1년이 되어 간다. 작년 여름 이후 두문불출하며 집 안에 머물렀다. 집과 직장을 기계적으로 반복해 오가며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발버둥쳤던 한 해 남짓의 시간은 거짓말처럼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무심코 달력의 한 장을 찢었는데 1년치가 뜯겨져버린 기분이다. 아주 가끔 빈 거리를 걸었다. 떠올릴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거리는 마치 재활을 위해 마련된 가상의 공간 같았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구름이 지나고, 바람이 불고, 비와 눈이 내리는 세트장에 홀로 갇힌 사람처럼 살았다. 오늘은 마을에서 가보지 않은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가보지 않은 길을 따라 산책을 했다. 잎들은 어느 사이..
연작소설의 2부에 해당하는 두 번째 버전 집필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그동안 주인공의 이름도 바뀌었고, 내용도 한 챕터를 제외하고는 전부 새롭게 쓰여졌다. 이제 하이라이트가 될 마지막 장, 9장만을 남겨놓고 있다. 큰 이야기 구조를 가진 장편소설의 특성상 어느 한 부분에 수정을 가하면 결국 이야기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좋은 일이다. 이야기와 인물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초고를 쓰고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들여다보면 예전에는 미처 들을 수 없었던, 인물들의 진심이 들리는 경우가 있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라 이거였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한 걸로 써두셨던데... 사실 그 말이 아니라 이 말을 했어야 하지 않나요? 그 미세한 말들에..
4월의 첫 비가 내렸다. 비 냄새가 솜털 같은 것을 보니 지금이 봄이었구나 싶다. 코로나19는 결국 직장을 문 닫게 만들고 말았다. 더 이상 언제 출근할 수 있으려나? 하는 불안정에는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 홀가분하다고 해야 할까. 20대를 마감하며 직업 군인을 첫 직업으로 가졌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내 가장 오랜, 그리고 가장 안정적이었던 직장생활이 되고 말았다. 이후 대안학교 교사를 2년 반, 까페 관리인을 1년, 중소기업 전속작가를 1년, 지역 창조기업 대표를 2년, 청소년 강사를 1년, 그리고 현 직장에서 또 2년을 머무르고 마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다들 짧은 기간이었지만, 각 환경 속에서 가장 성공할 수 있을 만큼의 성공을 맛본 후 마감했다. 대안학교에서도 사실상 교감의 역할에 가까운 일을 맡..
“여러분의 첫 번째 기억은 뭔가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에 대해 모색하던 한 모임에 초빙된 강사분이 물었다. 여러 회원들이 돌아가며 저 마다의 첫 기억을 꺼냈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들판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두세 살 정도의 아기일 무렵이다. 봄볕이 따스한 날이었다. 아기는 적당히 달궈진 시멘트 계단을 엉금엉금 팔꿈치로 기어오르다가 문득 담 너머의 들판을 바라본다. 색색의 꽃들이 만발해 있고, 하얀 나비들이 작은 날개로 봄 속을 팔랑팔랑 날고 있다. 엄마가 아기를 부른다. 아기는 까르르 웃으며 아무런 고민도 두려움도 없이 엄마에게로 다시 엉금엉금 다가간다. 아기에게 세상은 온통 축제였다. 내 기억은 비교적 정확했다. 우리 가족은 내가 두세 살이던 시절, 밀양의 2층 집에 세들어 살았다. 집 앞에는 ..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늘 무언가 손에 잡힐 듯하다가 곧 사라지고, 이제는 좀 쉬어도 될까 하는 순간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친다. 내 인생은 지나치게 나를 조롱하는 듯하다. 머릿 속이 복잡해지다보니 편두통의 빈도도 늘었다. 한 달에 한 차례 정도이던 것이 이제는 일주일에 두 번씩은 찾아오는 것 같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면 글 쓰는 일은 할 수가 없다.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하는 나날이 반복되니 몸도 마음도 약해진다. 스스로 내 인생에 좀 많이 지친 것 같다. 다시 힘을 내봐야지 하는 동기요인은 점점 흐려지고 많은 일들이 무의미함 쪽으로 기울어간다. 이 기분에 젖어들면 젖어들수록 나는 점점 더 초라해져 가겠지. 어디에도 기댈 곳 없었던 지난 1년. 시간이 언제 ..
예전에 연재했던 의 새로운 버전을 쓰고 있다. 오늘도 새로운 이야기를 썼는데, 이 이야기가 사실은 전에 썼던 이야기보다 더 오래된, 더 본래의 이야기인 것만 같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이 연작소설의 책을 발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시간을 들여 다시 써야 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삶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나는 상당히 운명론자에 가까운 것 같다. 작년 12월에 초고를 완성한 도 아직 발매를 못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도서 등록까지 마쳤으나, 출간 비용을 모으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 2월에 필요한 자금이 모아졌는데, 공교롭게도 코로나19 사태가 터져서 모아둔 자금을 지출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며 '오여2'의 행방도 묘연해지고 있다. 예술인복지재..
일희일비하며 코로나19의 시절을 건너가고 있다. 폐쇄되어버린 직장은 결국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고, 나는 무기한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하루는 막막하고 우울하고, 또 하루는 일상의 소소함을 그럭저럭 즐기다 작은 희망을 발견하며 지내고 있다. SNS에서도 이쪽에 가서는 총선의 난장판에 끼어들어 울분을 토로하다, 저쪽에 가서는 도인이 된 듯 안빈낙도의 삶을 전시한다.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다. 이것도 저것도 내가 아닐 수도 있고. 3월 초에 익명의 은인이 거액의 후원을 해주신 덕에 정신이 무너지지 않고 지낼 수 있다. 그 후원금은 더 값지고, 나 스스로도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데에 쓰고 싶어서 아직 통장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지만, 큰 돈이 아직 남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상당한 의지가 되는 것이다. 불과 몇 ..
3일 간의 두통에서 겨우 벗어났다. 목요일부터(시간 감각이 사라져서 목요일이 언제였나 싶지만) 시작된 두통이 점점 심해지더니 금요일에 정점에 이르고, 토요일에는 잔파도가 계속되었다. 어제는 또 갑작스레 생긴 비상상황에 대응하느라 하루종일 모니터 앞에 글을 쓰며 앉아 있었다. 일방적인 비난을 하루 종일 받아내는 것은 오랜만에 다시 겪어도 참으로 고역인 일이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GOP에서 장교로 근무할 때 나는 상황장교라는 역할을 맡았는데, 경계하고 있는 GOP 구역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연락 받고 기록하고, 조치하는 역할이다. 상황장교 앞의 전화는 2-3분 간격으로 울렸다. "필승! 고라니 한 마리가 00 지역을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필승! 철새 세 마리가 00소초 쪽으로 낮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