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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첫 번째 기억은 뭔가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에 대해 모색하던 한 모임에 초빙된 강사분이 물었다. 여러 회원들이 돌아가며 저 마다의 첫 기억을 꺼냈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들판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두세 살 정도의 아기일 무렵이다. 봄볕이 따스한 날이었다. 아기는 적당히 달궈진 시멘트 계단을 엉금엉금 팔꿈치로 기어오르다가 문득 담 너머의 들판을 바라본다. 색색의 꽃들이 만발해 있고, 하얀 나비들이 작은 날개로 봄 속을 팔랑팔랑 날고 있다. 엄마가 아기를 부른다. 아기는 까르르 웃으며 아무런 고민도 두려움도 없이 엄마에게로 다시 엉금엉금 다가간다. 아기에게 세상은 온통 축제였다. 내 기억은 비교적 정확했다. 우리 가족은 내가 두세 살이던 시절, 밀양의 2층 집에 세들어 살았다. 집 앞에는 드넓게 펼쳐진 꽃밭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내게 가장 오래된 사랑의 기억이다. 차갑고 캄캄한 밤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 듯한 시절에도, 이 기억은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에 머물며 봄의 온기와 오염되지 않은 빛을 나눠주었다. 이 기억뿐만 아니라, 내 안에 깃든 모든 사랑의 기억들이 사라지고 싶은 욕망에 맞서 몇 번이고 나를 되살아나게 했다.
하나의 문장. 몇 개의 단어. 몇 자의 이름으로 남은 기억들이 있다. “잊지 않을게요.” 라는 말보다 “기억할게요.” 라는 말이 나는 늘 더 좋았다. 내가 상처를 준 사람, 내게 상처를 남긴 사람, 오래 머문 사람, 잠시 스쳐간 사람, 특별했던 사람과 편안했던 사람, 내가 선택했던 사람과 선택하지 않았던 사람. 시절인연 속 그들의 이름을 꺼내 빈 방에서 가만히 소리내 불러보면 기억들이 실바람처럼 불어온다. 우리들의 짧은 생이 얻는 것은 결국 기억뿐이다. 사람이 여느 동물과 특히 다른 것은 무수한 기억으로 채워진 동물이라는 점이 아닐까.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이 무엇들을 기억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니 나는 가능한 많은 사랑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다. 신해철, 노회찬, 설리, 구하라, 세월호의 아이들과 어른들. 그리고 김용균 씨와 같이 조용한 소원을 지상에 남긴 채 너무 일찍 별이 되어버린 이름들을 간직하고 싶다. 글을 쓰는 일은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기억을 불러내 기록하는 일이다. 지상의 종이 위에 별을 새기는 일이다. 쓰여진 것은 영원에 가까워진다.
이름도 없이 죽어간 작은 오리들을 위해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기억은 종종 고통을 수반한다. 그것이 사랑의 기억이라 해도 불편과 성찰의 엄격함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그러하기에 기억해야 한다. 내가 아닌 너의 이름들을.
오래 기다릴게
반드시 너를 찾을게
보이지 않도록 멀어도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
- 아이유 ‘이름에게’
2019. 12. 2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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