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남이 갑자기 총을 꺼내들었을 때, 별일이 다 있군 싶었다. 통장의 잔고를 떠올리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와, 아차 했으나 그남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조금 언짢은 표정만 지어보였다. 나는 자 이제 어쩌라는 거죠 라는 심정이 되어 그남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남 자신도 딱히 준비해둔 원고가 없는지, 총을 든 채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별 수 없어서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뭘 원하죠? 돈, 아니면 저한테 무슨 원한이 있나요?” 그남은 긴장한 듯 더듬더듬 응답했다. “이...일단 신고, 신고는 하지 마요. 아니,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알았어? 알았냐고?” 그남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카운터에는 전화기가 없었고, 내 휴대폰은 그남 뒤편의 콘센트에 충전을 위해 꽂아둔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알..
당신이 떠나고 난 다음 날 숙소는 적막했습니다. 단풍잎 같은 깃털을 단 작은 새의 울음 소리가 창을 넘어오고, 가을볕은 투명한 강물처럼 넘실거려, 어떤 인생의 절정을 내게 선사하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불 속에서 멍하니 휴대폰 속 당신의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스물여섯,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의 미소와 그 속에 깃든 우리의 계절들을. 그대로 당신을 따라 공항으로 달려갈까 싶었지만, 어젯밤 짐짓 의연하게 당신을 배웅했던 일이 떠올라 숨을 골랐습니다. 간신히 이불 속에서 나와 숙소에서 주는 모닝토스트를 먹으러 갔습니다.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나를 위해 미리 지배인에게 이틀치 조식을 예약해두었으니, 꼭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당신은 떠났지요. 모닝토스트는 바삭하고, 촉촉했습니다. 우유는 신선했고요..
어울리지 않는 모든 유위와 단절하기로 마음 먹었다. 새해 들어 과거의 방식대로 살고 싶지 않아 선택했던 여러가지 일들은 공연한 사건들을 일으키고, 또 다른 번민의 씨앗이 되었을 뿐이었다. 마음의 뿌리는 그대로 둔 채로 가지가 뻗어나가는 모양만 바꾸려고 한 결과다. 그리움을 그리움대로, 외로움을 외로움대로, 어려움을 어려움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모면해보고자 애쓰는 동안 흰머리칼만 수십가닥 더 늘어났다. 유행을 체험해보자는 핑계로 시작했던 데이팅앱에서의 관계맺음은 한 차례 정도를 제외하고는 운명론자인 나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대화의 패턴마저 일정해져, 디지털 너머의 삶이 아닌 그저 앱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목표한 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쓸쓸함을 ..
폭설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일주일 내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던 아침 기온은 영상을 회복했다. 사무실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누가 황씨 노인의 집에 방문하는가를 두고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내 몫이 될 것을 예감했다. “김군이 가지.” 사무국장의 말에 모두들 안도했다. 황씨 노인은 30년 넘게 혼자 살고 있는 독거노인으로 자기 이름도 모를 정도의 치매를 앓고 있었고, 여러 가지로 건강상황이 좋지 않아 다들 이번 혹한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 예상했다. 사실상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방문이었다. 황씨 노인이 살고 있는 쪽방촌으로 향하는 가파른 비탈길에도 눈이 가득 쌓여 엉금엉금 기어올라 가야 했다. 미련이 남은 듯 하늘에선 진눈개비가 소륵소륵 떨어지고 있었다. 수차례 미끄러 넘어지면서도 기어이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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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농부에게 숲을 좋아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가다보면 늘 갈피마다 숲 속에 앉아 있는 나를 만난다. 옅은 물기를 머금은 흙 위에 앉아 무릎을 세운 뒤, 거기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면 슬픔도 불안도 잠잠해지고는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초록의 잎새들 너머의 푸른 대양에 거대한 구름의 배들이 지났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작은 몸에서 빠져나와 영혼의 배를 타고, 마음으로만 갈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책을 읽는 것은 지도를 펼치는 것과 같았다. 얼마 전 읽은 책들은 항해의 지도가 되어, 숲 속의 나를 보다 선명한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지난 여름 서울 해방촌에 있는 독립서점 별책부록에서 안리타 작가의 이라는 아름다운 지도를 ..
까페에서 커피를 내리던 때를 종종 생각한다. 대학시절 나는 캠퍼스 밖에 있던 여행동아리의 부원이었는데, 동아리방 바로 오른 편 지하에 중세 유럽풍의 핸드드립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나는 그곳에서 2년 남짓 아르바이트를 하며 커피를 내렸다. 아침마다 캄캄한 계단을 내려가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의 불을 밝히고, 클래식 음악을 선곡하고, 커피 한 잔을 내려 시음해보던 매일매일은 70 노인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다. 30대 중반 무렵에도 1년 간 커피 내리는 일을 했다. 보헤미안 점장님의 제안으로 개운사 담벼락을 마주보고 있던 작은 카페 ‘좋은커피’의 관리를 맡게 된 것이었다. 좋은커피는 전적으로 내가 관리했던 카페였기에 더욱 애정이 컸다. 한 켠에 독립책방에서 골라온 독립서적들과 평소..
깊은 멍 자국 같던 어둠이 옅어지더니 희미한 닭 울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나는 강 줄기 저편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낮은 지붕들의 눈을 바라보다가 아침을 맞았다. 겨울의 아침은 늦고, 음악 소리는 낮다. 아주 오래된 음악들은 어디서 오는가. 100년 혹은, 400년 전의 음악들이 작은 방을 가득 채울 때면 머릿 속을 지나는 상념들도 어쩌면 지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음악은 그저 씨디플레이어 중심축의 회전 속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지상을 떠난 음악가의 손끝에서 불멸의 재생을 거듭한다. 키보드를 치던 손과 타자기를 두드리던 손, 볼펜과 샤프, 만년필을 쥐던 손, 먹과 붓을 잡던 손을 떠올린다. 먼 옛날과 지금의 사이에 사라지지 않는 말들은 태어나, 우주의 의지를 채우고, 그것들 중의 어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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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시간이 나는대로 집필실 인테리어를 진행하고 있다. 구름정원의 인테리어 작업 중 가장 먼저 하려고 했었던 작업인데, 가장 나중에 하게 되고 말았다. 집필실 인테리어가 마무리되어야 소설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공연히 그 핑계로 계속 새 소설을 시작하는 일을 미루고 있어 핑계를 더는 못 대도록 인테리어 마무리를 서두르려고 한다. 집필실에는 친구가 오래 전 선물한 전자피아노가 있는데, 지난 주말에는 그 피아노를 위한 선반을 만들었다. 나왕합판을 이용해 만든 선반으로, 피아노 건반을 올려두는 판 아래는 책을 수납할 수 있도록 했고, 판 위로는 씨디를 진열할 수 있는 기다란 수납장을 만들었다. 10년 전, 그냥 한 번 해보지 뭐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나의 나무가구 만들기는 해를 거듭하며 일취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