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도 좋고, 다락방도 좋다. 두 단어 모두 무척 사랑하는 단어다. 두 가지가 조합이 된다면 최상일 것이다. 내 생애 최초의 개인방은 다락방이었다. 단언컨데 내게 다락방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락방에는 라디오가 있었다.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한 중학생 무렵, 나는 다락방의 알전구가 희미하게 비추는 주황빛 속에서 방과 후의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빨간 라디오의 안테나를 창 밖의 바다로 향하고, 디제이가 선곡해주는 발라드와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즐겨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종종 피터팬이 되는 상상을 했고, 인형 친구들과 세상에 없는 대륙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만날 수 없는 초딩시절의 풋사랑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쓴 ..
가을이 되면 구름의 표정들이 선명해진다. 가없이 높고 넓은 가을하늘은 구름들의 것이어서, 저마다 생기발랄한 빛을 띠고 창공을 누비는 것이다. 마치 오래 기다려온 긴 여행에 나서는 여행자의 표정 같다. 보랏빛에 가까운 진청색부터 물 위에 살짝 풀어놓은 파랑 물감 같은 연청색까지, 오늘 아침 하늘의 끝과 끝은 해상도 높은 파랑빛으로 가득하다. 그 위에 크고 작은 구름들이 우르르 피어나 지금 창 밖은 만개한 구름의 정원이다. 거실에 앉아 시시각각 스치는 하늘의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구름정원'이라고 붙인 우리 집의 이름을 새삼 자랑스러워하게 된다. 이사 온 후 보낸 한 해는 캄캄한 밤을 비추던 별빛으로 버텼는데, 마음을 조금 비우고 나니 깨끗한 하늘의 풍경이 내 안에 점점 영토를 확장한다. 나는 마치 코로..
외로움이 습기 속에 가득한 어제였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창문을 꼭꼭 닫아두고 있느라 집안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오후의 열기로 가득했다.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새어들기 시작한 습기로 실내는 그야말로 열대우림 같았다. 창문을 열고 사용해야 하는 작은 에어컨 남극이도 태풍 탓에 사용불가였기에, 나는 고스란히 아마존의 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선풍기에 의지해 재택근무용 업무를 마치고 나자 공연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때로 외로움은 짜증으로 온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게임기를 켜서 축구게임을 했는데, 손흥민이 제대로 골을 넣지 못하고 경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모르긴 해도 내 비명 소리에 같이 사는 반려인형들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유행하는 앱을 이용해 만난 적 없는 사람과 대화를 나눴..
사랑이 동전이라면 뒷면에는 늘 영원한 이별이 새겨져 있다. 우리 모두 영원히 앞면만을 보며 살겠노라 마음 먹지만, 사랑의 시절 속에서 때때로 동전의 뒷면을 슬쩍 훔쳐보다가 결국 어느 날 동전을 뒤집고 만다. 혹은 동전을 뒤집어두고 떠난 사람을 망연히 바라보게 된다. 내게 남겨진 동전의 뒷면을 외면하며 1년을 보냈다. 주말에 열차를 타고 먼 고장을 다녀왔다. 처음으로 '우리'가 되었던 날 거닐었던 그 거리와 천변을 혼자가 되어 다시 걸었다. 내 삶에도 사랑의 계절이 몇 번 있었다. 결과만 두고 본다면, 사랑이란 모든 생명은 결국 영원한 혼자로 돌아간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유년의 빛나던 순수도, 학창시절의 드높던 꿈도 계절의 순환 속에서 스러지고 지금 여기 남은 것은 오직 혼자인 나뿐인 것처럼. 나..
8월이 되면 광주에 다녀오겠다고 새해부터 마음 먹고 있었다. 내게 큰 의미가 있는 날에 맞춰 휴가도 냈는데, 하늘이 돕지 않고 있다. 광주행 열차가 운행을 중단했다는 소식을 아침 속보로 접하고, 멍하니 구름정원 거실에 앉아 권순관의 2집 앨범을 빗소리에 섞어 듣고 있다. 내일은 비가 좀 잦아든다고 하는데 부디 일기예보가 이번에는 맞기를 바란다. 소중히 지키고 싶었던 기억을 조금씩 흘려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마음의 수문을 연다고 해서 그 많은 것들이 흘러가버릴 수 있을까 싶지만, 순리대로 천천히 해나가야 할 일이다. 광주에 가면 깊은 밤의 천변을 걷고, 문이 닫힌 상점들 사이를 지나며, 빛이 희미하던 시절의 노래를 들으려 한다.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밟고 대나무 숲의 벤치에 앉을 때는 먹구름 사이로 ..
1년은 어디로 갔을까. 이불도 없는 빈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솜이 빠져나간 베개처럼 무용하게 흘려보낸 1년이었다. 하루하루 멍하니 일터의 자리를 지키고, 집에 돌아와 움츠러드는 것만을 무한히 반복하며 살다가 보니, 갑자기 코로나가 왔고, 휴직과 해고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해변에서 문득 잠들었다가 갑자기 밀려온 해일에 아주 뜻밖의 섬으로 밀려나버린 후 깨어난 기분이다. 난 누구? 여긴 어디? 인생에 크게 지쳐버린 것도 같고, 이제 다시 시작인 것도 같다. 꼭 김광석의 노래 같다. 문 밖의 하늘은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아무런 위로도 소용이 없어 보인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머리 속을 파고들어가 작은 점의 유리조각이 된 슬픔으로부터 쓸쓸함은 생산된다. 1년이 지났..
쓰나마나한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마나한 말도 좋아하지 않아서 타인에게 굳이 충고의 말 같은 것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요즘 서점에서 내 판단으로는 하나마나한 말들이 가득한 책이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웹상에서 인기를 얻는 글도 대개 그런 유형의 글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형식이다. 외롭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나도 외로우니 너도 외롭겠지. 우리 모두 외로운 밤.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나를 위해 너는 희생되어도 좋다는 말이다. 위대한 시인 아무개는 이렇게 썼다. "내가 죽어 네가 산다면 / 너는 살고 나도 영원에 살으리." 머릿속의 단상들을 아주 약간의 필터링만 거쳐서 문장으로 옮겨놓은 글들은 전후 맥락을 파악할 필요도 없고, 구구절절한 사..
여름이 온다. 아직 날씨는 봄과 여름 사이를 오가고, 유행하는 감염병으로 인해 세상은 어수선하지만 예정대로 여름은 오고 있다. 사람의 인생에도 계절과 같이 어김 없이 찾아오는 예정된 것들이 있을까. 운명이라 부르는 사건, 인연이라 부르는 마주침. 살아오며 겪은 여러 사건과 마주침을 때로 운명이나 인연으로 해석하였으나, 실은 내 손에 내 인생 전체의 계획표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것들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들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어쩌면 그것은 예정되어 있던 것들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거나, 그렇게 믿기로 마음 먹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온 우주가 몇 가지의 물리 법칙에 따라 이토록 성실히 예정된 것들을 꺼내놓는 모습을 대하면,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인간의 삶 또한 예정된 무엇이 나타나는 과정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