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리듬이라고 쓸까하다가 '생生'의 리듬이라고 쓴다. 생에는 리듬이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저마다 어울리는 생의 리듬이 있다. 어떤 생의 리듬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것 같고, 또 다른 생의 리듬은 사랑을 기다리며 떨어지는 꽃잎을 세는 것과 같다. 내게 어울리는 생의 리듬은 생후 오개월 정도 된 오리가 마음을 굳게 먹고 태평양을 건너가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다.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마치 딱따구리처럼 살았다. 사실 지난 몇 년이라고 할 것도 없다. 생의 대부분을 어울리지 않는 리듬에 맞춰 산 것만 같다. 어느 한적한 초여름에 그늘이 진 벤치에 앉아, 소리 없이 호수에 떨어진 나뭇잎이 파문을 그리는 장면을 천천히 바라보는 것과 같은 리듬으로 살아가고 싶다. 아마도 그러자면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이나..
모두가 글을 쓰는 세상이다. 비디오 스타가 라디오 스타를 죽이는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고, 영상이 인류의 언어를 대체하리라고 예상했던 20세기 말의 미래학자들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게 됐다(무덤 속에서 그 일이 가능하다면). 오히려 21세기 인류는 그 어느 시대보다 훨씬 더 문자를 많이 쓰고 읽는 인류가 되어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켜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쓴 글의 독자가 된다. 가끔 우리는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리트윗된 내 글의 독자가 스스로 되기도 한다. 점점 인류는 자기 스스로 글쓴이이자 독자가 되어간다. 문자는 이제 중세 시대처럼 특정 계층의 사유물도 아니고, 고등한 교육을 받아야만 습득할 수 있는 기술도 아니다. 지식과 정보는 문자만 알고 있으면 '검색'을 통해 금방 획..
#1. 오리와 윤동주 윤동주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대표단을 선발하라고 한다면 이 시를 빼놓을 수 없다. 귀뚜라미와 나와 귀뚜라미와 나와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뜰귀뜰귀뜰귀뜰 아무게도 알으켜 주지 말고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 귀뜰귀뜰귀뜰귀뜰 귀뚜라미와 나와달밝은 밤에 이야기했다 윤동주 시인은 달빛이 엎질러진 잔디밭 위에 누웠을 것이다.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들을 헤아렸을 것이고, 적막을 채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별의 소리처럼 느꼈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귀뚜라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아무게도 알으켜 주지 말'자고 약속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리라. 누구에게나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혹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이야기가 있다. 나와 오리 사이의 이야기가 그렇다. #..
누군가이든, 어떤 꿈 속의 삶이든 개봉하던 첫 날 바로 영화 를 보았다. 추석 연휴 기간이었다. 지금은 윤상의 음악을 듣고 있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우디 앨런 감독을 우디 앨런 감독이라고 불러본 일이 없다. 나는 항상 그를 우디 '알렌' 감독이라고 호칭했다. 지금까지 나열한 말들 사이에는 서로 아무런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단지 나라는 사람 속에서 자연스러운 순서에 따라 흘러나온 말들이라는 것 외에는 말이다. 에 대해 단 한 줄의 평만이 허락 된다면 이렇게 말하고 말겠다. 그 영화요? 첫사랑의 추억에 사로잡힌 사람의 흔한 연애담이지요. 지겹게 반복되고 변주되어 온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허락된 것은 한 줄이지만 결국 두 줄에 걸쳐 이렇게 말하고 말 것이다. 영화관을 나서며 '쳇, 뭐야?' 라고 속..
"수는 이번에도 10미터 간격을 유지하며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는 딱 한 번 멈춰 서서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오랫동안 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 외엔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부지런히 여자를 따라가다 보니 여자가 어디로 가는지 어느 순간 분명해졌다. 바람이 신선했다. 바람이 가는 곳은 여름의 끝일 터였다. " - 조해진 194P 여름을 지나가고 있다. 바람은 차가운 곳에서 뜨거운 곳을 향해 분다. 대류 현상 탓이다. 공기는 풍부한 곳에서 희박한 곳으로 움직인다. 뜨거워진 공기가 대기의 상층부로 올라가버린 빈 자리에 상대적으로 차가운 공기가 흘러와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바람이 가는 곳은 여름의 끝"이라는 말을 한참 동안 생각했다. 여름의 끝은 어디일까. 지구의 적도 부근이 역시 여름의 끝인 것일까. 계절..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에게 침투한 악어 바이러스 이런 상상을 해보자. 약 2억년 전 중생대에 서식했던 악어의 조상 '테레스트리수쿠스Terrestrisuchus'(이름이 복잡하니 '테레'라고 하자)가 멸종하지 않은 채 인류와 금단의 이종교배를 이루어 인류의 한 부류로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테레'들은 인간 남성들을 다 잡아먹어버리고 남자 사람의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이 괘씸한 테레놈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0. 대부분 수컷이다.1. 고등생물체로서의 성욕 조절 능력이 없다. 2. 인간 여성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인간 여성들을 다른 테레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내가 잡아먹기 위해서다. 4. 인간 여성들이 테레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것은 인간 여성들의..
GOP근무를 마치고 중위로 진급한 무렵부터 새벽 5시-6시경에 깨어 소설을 썼다. 도저히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시간을 쪼개 쓰기 시작한 게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벌써 7년이 넘었다. 그런데 그중 5년 동안 쓴 소설은 조금 허무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재작년에서야 알았는데 인터넷에 개인적으로 발표한 글이라도 일단 발표가 된 글은 공모전 등에서 심사조차 받지 못하고 탈락이라는 것이다. 약 스무 편이 넘는 소설이 그냥 소모되고 말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인터넷에 올렸다가 좋은 반응을 얻은 소설을 몇 번 공모전에 내봤다가 번번이 떨어지고 왜 그럴까 생각했었다. 허망한 일이다.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내가 한 일인 것을. 오늘도 공모전에 내보려고 글을 정리하고 있다. 요즘은 두 편을 내야 한다. 하나는 ..
오늘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초여름의 조각을 주웠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왜에 따라 설명해달라고 누가 요청을 한다고 해도 답해줄 수는 없는 그런 과정을 통해 입수했다. 이 '초여름의 조각'이란 것은 참으로 설명하기가 난감한데... 애써서 설명을 해보자면 천천히 달리는 차창에 우연히 회색의 돌담과 그 담을 반쯤 덮은 담쟁이 덩굴이 보이는 순간의 느낌 같은 것이다. 봐라. 애초에 내가 그래서 설명하기가 난감하다고 한 것이다. 블루레이 디스크에 1테라 정도 용량의 햇살을 담아오지 않는 한 충분히 상대에게 초여름의 조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 과감하게 초여름의 조각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은 포기하기로 하자. 우리는 방금 전에 초여름의 조각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