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의미 이유없이 너를 사랑하던 시간은 다 가버리고 너에 대한 사랑의 이유를 찾아야할 시간이 왔다 우리 왜 서로 그리워해야 하나 우리 왜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하며 우리 왜 서로 바람 부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나 함께 있을 때도 혼자 가는 여행 길에서도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너와 헤어지기로 했다 너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목에 작년 너를 안고 보았던 흰 눈이 내렸다 나는 그만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그 하얀 눈이 사랑의 이유인 줄은 몰랐다 너의 의미가 내 속에 있는 줄만 알았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줄은 몰랐다. 2011. 12. 5. 동해로 가는 야간 열차에서. 멀고느린구름.
까페 스타벅스 종로 거리를 쏘다니다 지쳐서 까페 스타벅스에 들 때면 워렌버핏과 제비 다방 그리고 죽어버린 루이 암스트롱에 대해 생각한다 그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달을 떠올릴 때면 닐이 아닌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를 그의 목소리가 달의 바다 어디쯤인가를 부유하고 있으리라 상상한다 재즈가 흐르는 별의 저편에서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차들이 교차하고 그처럼 청춘의 말들은 서로 어긋나기만 했다 자본의 심장 위에 앉아 유통기한이 끝나버린 붉은 혁명과 에르네스트 체 게바라의 눈동자를, 커피에 담긴 적도의 신산한 삶을 자조한다 문학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 자들만이 문학의 죽음을 외친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재즈가 흐른다 순간은 순간으로 끝이 날 것이다 크레이터와 루나 마레를 나누면 그것은 더 이상 달..
붉은 숲 길을 걷다 멈추고 보니 숲이 제 속으로 조용히 타들어가는 소리 들린다 오래전 삼킨 불꽃이 목에 걸려 까마귀는 앙앙 운다 밤을 부르는 매미들의 염불이 떨어지는 잎새들 사이를 채우고 야윈 가지들, 가지들 사이로 공백한 하늘이 있다 주인 없는 벤치에 외로 누워 눈 앞의 백지에 모자란 연서를 쓴다 아아 그대여 안녕 그리고 또 안녕 그때 붉은 잎새 한 잎 가슴 위에 내려앉는다 소라 고동을 닮은 잎사귀 가슴에 피가 고인다 천천한 바람이 분다 2011. 10. 12. 멀고느린구름. 금학산에서.
북촌 방향으로 사람들이 걸어가지 않는 길만 걸어가려 했다 그날 저녁은 하늘을 두 개의 분단으로 나누고 달은 이르게 나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름들은 기다란 강이 되어 외로워했고 바람은 가을아 가을아 나직이 읊조리고 있었다 비탈진 길을 더러 오르고 더러 내렸다 아이들이 골목을 내달리는 소리에 맞춰 너를 추억했다 모든 지나간 것들은 북촌 방향에서 꽃을 피우고 가을이 되면 낙엽으로 졌다 오래된 문들은 너를 숨긴 채 침묵했다 배고픈 새들이 너를 감춘 집들 앞에서 낮게 울었다 멀리 남산타워 근처에 우리들은 수줍은 맹세를 써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그것을 보러 가지 않았다 도망치기 위해 산 생이었다 만나기 위해 사는 생을 소원했다 심심헌의 기와를 타고 수 십 수 백년을 흘러내렸을 빗물처럼 내 속의 온갖 눈물을 다 쏟..
파리가 사람에게 파리가 사람에게 한마디 한다면 아마 이러지 싶다 당신의 영공과 영토를 알지 못한 죄가 이다지도 큰가요 날개를 달고 태어나 날아다녀야 할 하늘을 날아다닌 것이 우리네 얇고 가녀린 자유가 그렇게도 욕된가요 우리에게는 영공도 영토도 없어 당신이 길 가거든 길 가는 대로 편히 가시라 물러나건만 겨울이 오면 지고 마는 한 철 주권도 지니지 말라 하나요 파리가 사람에게 끝으로 한 마디 더 한다면 아마 이러지 싶다 당신이 졸음에 눈을 깜박하는 사이에 우리는 날아오르려 날아오르려 수 천 수 만 날개짓을 하거든요 우리 육신이 가볍다고 생의 무게마저 가벼울까봐요 파리 목숨이 어디 사람 목숨따위보다 천근 만근 쉬이 가벼울까봐요 2011. 7. 13. 멀고느린구름.
와온(臥溫)의 저녁 유재영 어린 물살들이 먼바다에 나가 해종일 숭어 새끼들과 놀다 돌아올 시간이 되자 마을 불빛들은 모두 앞다퉈 몰려나와 물 길을 환히 비춰주었다. --------------------------------------------- 전남 순천에 있다는 고장 와온. 그곳에서 기다린다면 오래전 집을 떠난 어머니들도, 형아들도 모두모두 손을 잡고 저녁이 되면 우우 해변가에 모여들 것만 같다. 떠나간 옛사랑도 그러할까...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그대의 손을 잡고 와온에 가서 다정한 내일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싶어진다. 2011. 7. 13. 멀고느린구름.
강변역에서 정호승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우리가 지금 멀리 있을지라도 우리가 지금 멀리 있을지라도 저 바람 한 올기 네게 가닿지 않겠냐 아슴푸레한 기억같이 내 이야기 들리지 않겠냐 곁에 있을 땐 사랑은 별이 되었다가 너 먼먼 소식으로 가마아득하니 내 눈가에 비로소 사랑이 자옥이 쉬러 왔다 밤은 청량한 숨 소리 함께 거닌 바닷가 위 남은 네 발자욱 소리 별이 빛나는 밤 고흐는 귀를 자르고 나는 미리내 흐르르는 소리를 사물사물 찢어 귀뚜라미 입에 대어보며 누구나 상처는 깊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헤아리려는 것은 별을 값보는 일 처럼 슬프고 우스운 일이지만 앙당그러진 눈가에 아롱아롱 방울피리 부는 연정은 별보단 조그만 사랑 고작 네 밤길만을 비추는 사랑 이 사랑 너무 작고 불안해 너는 자꾸 떠나려했을까 별처럼 우주처럼 멀어질까 우리가 지금 멀리 있을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