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그해 겨울. 바스러진 언 숨이 화톳불 곁 군밤장수의 털신까지 쌓이던 겨울. 하루하루 겨울날은 그리도 추웠다. 자정 넘어 어머니는 눈송이 같은 어머니는 동태처럼 지쳐 돌아왔다. 꺼져 버린 연탄불...... 한숨으로 도독한 지갑 뒤적이더니 번개탄 대신 어머니가 사들고 온 복권 두 장 꿈으로 가는 기차표 두 장. 무명이불 말아 덮고 훌쩍이던 내게, 내 배고픔 속에 어머니의 시린 나날 속에 놓인 쓸쓸한 희망. 천만원만 걸리면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막내 도시락에 두 종류 반찬을 넣을 수도 있다. 아니 그저 그저...... 천원만 걸리면 순대를 사먹을 수 있겠지...... 복권을 긁으며 전 생애로 긁으며 몇 만 시간만에 피식 웃음이 났다. 덧없이 부풀었던 그 작은 꿈 그 바램이 넘친 탓..
오전에 내리는 가랑비 비가 온다 투둑투둑 벌레가 운다 귀한 사랑을 제 손으로 다 떠나보내고 쓸쓸하다 외롭다 쓰며 괜시리 창 밖에 우는 벌레를 나무란다 옆 방에서 들려오는 사랑노래도 너무 유치하다 더운 날에는 서늘함을 그리워하고 겨울에는 지나간 열정의 미온으로 마음 녹이듯 달이 있을 때는 달이 어두움 내모는지를 모른다 귀중한 것은 어찌 항상 가랑비로 내리고 여우비 마냥 사라지는가 모든 비를 나는 우산으로 받았다 하루라도 흠뻑 젖어 본 적 없었다 벌레만큼도 울어 본 적 없었다 다만 둥근 그늘의 집에 앉아 우편함에 편지를 넣고 가는 당신을 길게 자란 손톱인 듯 바라보았다 비가 온다 벌레 운다 가랑비들이 모여 긴 소나기가 된다. 2006. 6/20. 멀고느린구름.
생선 정종목 한때 넉넉한 바다를 익명으로 떠돌 적에 아직 그것은 등이 푸른 자유였다 고등어,참치,청어,정어리,꽁치.....그런 이름을 달고부터 그물에 얽히고 몇 두릅씩 묶여 생선은 도마에 오른다 도마에 올라 두고 온 바다를 헤집는 칼날 시퍼렇게 날을 세운 배후의 죽음을 넘보고 살아서 지킨 육신의 토막토막 냉동된 자유, 성에 낀 비늘을 털며 까마득한 불면의 바다를 지탱해온 가시와 뼈를 발리우고 부드럽게 등을 구부리고 마지막 살신을 위해 제단 위에 오른다 석쇠 위에서 시커멓게 알몸을 그슬려 마침내 헛된 저의 이름마저 산산이 찢기우고 소금을 뿌려주세요 환호처럼 은총처럼 가슴까지 뼛속까지 황홀하게 저미도록 오늘도 헛된 이름을 쫒아 붉은 아가미를 헐떡이며 보이지 않는 그물 속으로 쓸려가는 고기떼,고기떼 썩은 생선..
소에게 소야 너는 봄볕처럼 맑고 다정한 눈을 갖고 태어났단다 네가 가녀린 두 다리를 떨며 일어섰을 때 지구 위의 모든 게 바로 서는 것 같았다 소야 어린 소야 엄마의 온기어린 젖 대신 이름모를 타지의 우유를 먹고 자랐지 넌 가끔씩 멀리 떠가는 구름을 지켜보던 소야 거기에 네 엄마 얼굴이 있었나 너의 작은 등 어디에 주사 바늘을 꽂을 수 있을까 너의 눈망울 어디에 내가 죽음을 심을까 미안하다 나는 네 엄마이고 아빠이고 혹은 누이인 것을 먹으며 한 번도 너를 떠올리지 않았다 너의 등 위에도 5월의 나비가 앉았다 갔음을 너의 눈망울 가득히 삶이 어렸음을 너의 가슴에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 꽃 피었음을 나는 떠올리지 않았다 너를 사랑으로 키웠으나 너를 사랑하지 않는 세상에 보내려 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도무지 ..
언젠가 그대를 만나면 장명진 억수 같은 비가 퍼붓고 바람이 우수수 이는 날이라도 좋겠다 언젠가 그대를 만나면 병든 로즈마리와 병아리눈물을 파스텔그린빛의 새 화분에 분갈이 해주고 그대를 향해 난 창가에 놓아두겠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대와 내가 살 작고 충분한 집을 짓겠다 여름 내 뭉게구름 한 조각 내려와 묵을 수 있을 정도의 집이면 좋겠고 평보다 품이 넓은 집이면 더 좋겠다 무엇보다 그대가 웃고 있으면 됐다 저녁이면 먼저 집에 들어 밥을 짓고 고달픈 어깨를 위로할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바르게 살기보다 아름답게 살고프다고 그대의 무릎에 기대 어린 고백하고 싶다 그대와 꼭 끌어안고 잠들 때도 커튼을 열고 숲과 하늘과 바람에게 우리네 온기를 자랑하겠다 사랑할만한 것을 사랑하는 건 죄가 아니라고 선언하..
마지막 저녁, 라벤더 차를 마시며 장명진 주전자씨 왜 그리움을 끓이면 한숨만 나요 라벤더 한 잎 추억에 휘휘 저어 열뜬 물 위에 띄우면 마스카라 번지듯 못다 핀 꽃이 소르르 풀리고 수심 재러간 오롯한 라벤더 한 잎 귀퉁이에 숨어 모락모락 편지를 피워요 기억나니 떠오르니 생각나니 너도 가끔 지나간 기차를 기다리니 오늘도 자전거로 골목 어귀를 지날 때 나는 보았어요 아닌척 시침떼며 이미 지나가는 새털구름 흔들바람 도랑물 고양이 비닐봉다리 너 소풍 마친 아이들처럼 집으로 우린 함께 돌아갈 순 없어요 사랑 파는 마트에도 반아인슈타인적 상품은 없거든요 페달을 뒤로 밟아도 잎새는 지거든요 라벤더 차를 마시며 그만 웃고 울어봐요 우리 마지막으로 본 그 영화 '라벤더 향기'를 위해 주전자씨 왜 그리움은 식으면 웃음만 ..
지난 번 널 만났을 때 지난 번 널 만났을 때 봄이었다 우리는 벚꽃 사잇길을 나란히 걸어 낡은 까페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벽에다 사랑과 청춘을 쓰게 되었을까 저마다의 숱한 벽 위에 쓰인 이야기는 너에게로 흘러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날개짓을 했지만 새장은 날아오르지 못했고 1990년대에 유행한 음악들에 대해서만 우리는 말할 수 있었다 서로가 하나도 변한 게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우리는 변해 있었다 거리로 나와 쓸쓸한 바람을 맞았지만 마냥 쓸쓸해질 수는 없었다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왔기에 바다가 있는 도시에 대해 이야길 나눴다 아무 공통점 없는 말들이 오갔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서로가 변한 게 없다며 위로했다 우리가 알던 사람 중 더러는 꿈을 이뤘고 더러는 성공했고 ..